실리 앞세운 CPTPP 참여, 농어업 대책과 함께 '기회의 문' 열어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EBS 강연에서 던진 “한국은 왜 기회의 문을 잠그나”라는 질문은 미·중 패권 경쟁과 공급망 블록화 속에서 길을 잃은 대한민국 경제에 무거운 화두를 던진다. 과거 우리는 자유무역주의라는 평평한 운동장 위에서 홀로 달려서도 세계 선진국들을 추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는 진영 중심으로 울타리를 높이고, 기술과 자원마저 안보 무기화하는 ‘합종연횡(合縱連橫)’의 시대로 변모했다. 이제는 누구와 손을 잡고 연대하느냐가 생존을 가르는 핵심 분수령이다.
이러한 메가 트렌드 속에서 제안된 ‘한일 경제공동체’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은 거스를 수 없는 당면 과제다. 한·일 양국이 매년 수입하는 3,000억 달러 규모의 화석연료를 공동 구매하는 등 에너지를 비롯해 인공지능(AI)·반도체 공급망에서 힘을 합친다면, 글로벌 시장의 규칙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룰 테이커(Rule Taker)’에서 규칙을 제정하는 ‘룰 세터(Rule Setter)’로 도약할 수 있다. 현재 한·일 간에 양자 자유무역협정(FTA)이 부재한 상황에서, 일본이 주도하는 CPTPP는 양국 경제 협력과 글로벌 경제 영토 확장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통로가 될 것이다.
정부 추산에 따르면 CPTPP 가입 시 향후 10년간 국내총생산(GDP)이 8조 8,000억 원 유발 증가하고, 제조업 생산은 6조 원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게다가 양자 FTA가 없어 우리 기업들이 진입에 애를 먹었던 멕시코 등 북미·중남미 교역 거점과의 관세 장벽이 허물어지는 효과도 크다. 가입을 미룰수록 우리가 치러야 할 기회비용과 국가적 손실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대한 거시경제적 편익 뒤에 가려진 농림어업 부문의 희생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CPTPP는 높은 수준의 시장 개방을 지향하는 만큼, 가입 시 국내 농림어업 생산은 10년간 약 8,500억 원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방적인 개방은 가뜩이나 고령화와 기후변화로 벼랑 끝에 몰린 농어촌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정부는 제조업의 이익을 농어민의 희생으로 맞바꾼다는 인식을 불식시킬 수 있는 촘촘하고 실효성 있는 대책을 선제적으로 내놓아야 한다.
우선, 단순한 사후 보상성 보조금 지급에서 벗어나 국내 농어업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고도화 전략이 시급하다. 자유무역협정 이행지원기금을 대폭 확대하여 디지털 스마트팜과 첨단 양식 시스템 도입을 전폭 지원해야 한다. 이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고부가가치 품목으로의 전환을 유도해야 한다. 또한 민감 품목에 대한 양허 제외나 장기 관세 철폐 등 가입 협상 과정에서 최대한의 방어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국산 농수산물의 프리미엄 브랜드화 및 환태평양 시장 역수출 기회 확대를 위한 마케팅 지원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 영토의 확장과 개방은 국가 성장의 필수 동력이지만,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안쪽의 울타리를 단단히 다지는 일 역시 국가의 책무다. 정부는 국익을 위한 CPTPP 가입을 과감하게 추진하되, 농어민과의 긴밀한 소통을 바탕으로 상생 대책을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 실리적 결단과 포용적 보완이 맞물릴 때, 비로소 대한민국 경제의 잠긴 기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힐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