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건 매일 국 끓이는 일
그리움이란 양념은 맨 마지막에 넣는다
너무 오래 끓이면 눈물 나니까
시락국
도종환
저것은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 -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우기 위해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위 무청시래기를 물에 불린 것. 아래 왼쪽 무청 오른쪽 무청시래기
시래기는 가을 무청을 한 묶음씩 짚으로 묶어 말려놓았다가 겨우내 필요할 때마다 조리해 먹던 식재료로, 전국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흔하면서도 부담 없는 서민들의 식재료였다.
특별히 재료가 필요하지 않고, 조리하는 방법도 비교적 간단하기에, 시래기로 밥을 지으면 시래기밥이 되고, 죽을 쑤면 시래기죽이 되었다. 이렇게 국과 찌개, 나물 등 시래기만 있으면 다양한 ‘시래기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가 있었다. 삶은 시래기를 된장에 버무려 냉동시켜 놓으면 언제라도 가정에서 쉽게 조리해 먹을 수도 있다.
제천에서 오랜만에 시락국을 먹었다. 태백에서 실컷 눈 구경하고 귀향하는 저녁에 추적추적 궂은비가 내렸다. 심신이 꿉꿉하던 차에 제천역 앞 작은 식당에서 낯익게 구수한 냄새가 발길을 이끌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시락국이 슬슬 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울컥해지는 마음을 추스리느라, 한참을 시락국이 끓는 솥 앞에 서 있었다.
시락국은 어린 시절에 자주 먹던 추억을 소환하는 마음의 음식이다. 어린 시절 밥이 모자라면 어머니는 시락국에 밥을 말아 국밥을 끓여주셨다. 그 시락국밥에 무김치 하나 입에 물면 꿀맛 달리없는 감지덕지 했던 시절이 있었다.
시장에 지천으로 나뒹구는 배추 겉잎이나 값싼 얼갈이, 한때 내버리던 무청 등을 걷어다, 멸치 육수에 된장 묽게 풀고 미리 데친 시래기를 넣어 끓여내면 시락국이 되었다.
원래 ‘시락’은 시래기의 경상도 말이다. 어머니가 시장 가서 시래기 좀 줏어온네이, 하시면 득달같이 달려가 시래기 한아름 안고 왔다. 시장을 돌다보면 10원짜리 동전을 줍는 행운은 다반사였고, 더러는 꼬깃꼬깃 접힌 천원짜리 종이돈을 득템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시락국
박상봉
비는 색종이처럼 젖은 오후를 접고
역전식당 문 앞으로 발길 이끌었다
무쇠솥에 시락국 끓는 냄새
눈물보다 더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어린 시절 엄마가 시장 가서 시래기 좀 주오니라, 하면
득달같이 달려가 시래기 한아름 안고 왔다
시장 바닥은 채소의 탈의실
지천으로 나뒹구는 배추 겉잎과 무청들이 누워 있었다
그것들을 걷어 품었다
멸치 육수에 된장 한 줌 풀고
식은밥 한 술 띄우면
국이 아니라 기도가 끓기 시작했다
지금도 배추 이파리 줍는 꿈 자주 꾼다
푸르름은 사라졌지만,
기억은 여전히 끓는 시락국 찾아다닌다
시락국은 가난의 조각이지만
그릇마다 울컥이 담겨 있다
사는 건 매일 국 끓이는 일
시래기 같은 기억과 된장 같은 말
식은 밥 같은 감정을 불 위에 얹는다
그리움이란 양념은 맨 마지막에 넣는다
너무 오래 끓이면 눈물 나니까
시락국의 원조 통영 서호시장
시락국은 으레 시장의 허름한 백반집이나 시락국밥집에서 비교적 싼 가격에 먹을 수 있는 오래 전부터 가난한 이들에게는 친구처럼 편안한 음식이다.
시래기밥 또한 풍미가 좋아 요즘 별미의 건강음식으로 꼽히고 있다. 시락국은 지역마다 육수를 달리 하고 있는데 부산경남은 멸치와 장어로 육수를 내고, 경상도 내륙지방은 돼지고기로 육수를 낸다. 중부지방에는 소고기로 육수를 내기도 한다.
시래기의 식재료 또한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무청과 배추 겉잎, 얼갈이배추 등이 그것이다. 부산 영도지역에는 시래기와 함께 해안가에 지천이던 곰피를 활용해 시락국을 끓이기도 했다.
육수는 멸치를 쓰기도 하고 장어 등을 고아서 쓰기도 한다. 들깨가루를 쓰는가 하면 산초를 듬뿍 뿌려먹기도 한다. 양념도 먹는 이의 입맛에 맞춰 다진 청양고추와 마늘, 소금, 고춧가루, 산초가루 등을 넣어 먹을 수 있는 것이 시락국이다.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다양한 음식으로 변주되는 음식 또한 시락국이다. 국밥으로, 술국으로, 해장국으로, 산초 듬뿍 넣으면 추어탕식 음식이 됐다가, 된장을 많이 풀면 토장국이 되기도 하고, 장어로 육수를 내면 장어탕이, 돼지고기를 숭덩숭덩 썰어 넣으면 돼지찌개처럼 되기도 하는 것이 시락국이다.
대학생 시절 시장 구석빼기에서 공짜 시락국에 막걸리 한 잔 들이키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늘 가난했고, 그런 우리를 시락국집 할매는 빈 시락국 그릇을 계속 채워 주는 것으로 우리를 이해했다. 민주주의니, 독재정권이니 하면서 울분을 토하던 시절, 막걸리 한 잔과 시락국 한 그릇에 시대의 정신이 형형하게 빛났던 시절이 있었다.
겨우내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하며 잘 말린 시래기에, 촌 된장으로 바글바글 끓여낸 시락국.
국에 밥을 말아 한 술 뜨면, 부드러운 목 넘김에 세상의 갑갑함 또한 시원하게 풀렸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이면 입안은 입가심하듯 개운해지고, 뱃속은 편안하고 든든해지는 것이다.
뜨거운 시락국 한 그릇 먹고나니 눈밭을 돌아다니면서 한겨울 한파에 꽁꽁 얼었던 온몸이 온통 따뜻하게 풀려나고, 마음이 환하게 밝아온다.
시락국은 통영 서호시장이 또한 유명하다. 안도현의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 ( 창비, 2008)에 수록된 시락국 시 한 편 더 읽어보자.
삶은 배추시래기
통영 서호시장 시락국
안도현
새벽 서호시장 도라무통에 피는 불꽃이 왁자하였다
어둑어둑한 등으로 불을 쬐는 붉고 튼 손들이 왁자하였다
숭어를 숭숭 썰어 파는 도마의 비린내가 왁자하였다
국물이 끓어넘쳐도 모르는 시락국집 눈먼 솥이 왁자하였다
시락국을 훌훌 떠먹는 오목한 입들이 왁자하였다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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