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 ‘숨은 돌’ 정진숙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등록 2026-09-22 00:10


‘숨은 돌’ 정진숙





경기 파주 북시티에 가면 은석교(隱石橋)가 있다. 출판인들은 오늘도 그 다리를 건너 다닌다. 은석은 출판인 정진숙의 아호이며 그는 을유문화사 창립자이다. 지난 22일 96년간의 생을 마감했다. 다리는 생전에 세워졌으니 그는 살아서 그 다리를 건너봤을 것이다. 을유문화사는 63년 동안 7000종의 책을 펴냈다. 책을 낼 때마다 책이 지닐 향기를 떠올렸다니 수천종의 책 향기로 저승길은 향기로웠을 것이다.


은석은 집안 어른인 위당 정인보 선생(1892~1950)의 강권으로 출판업에 뛰어들었다. “36년 동안 빼앗겼던 조선의 문화유산, 언어, 문자, 이름까지 되찾으려면 36년이 다시 걸린다. 문화유산을 되찾는 일, 그것이 출판이다.” 일제 강점기는 우리 말을 잃어버린 시간들이었다. 해방이 되어 말을 찾았으나 말은 말이 아니었다. 은석은 말을 닦고 역사를 세우는 기념비적 저서를 발간한다.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과 진단학회의 ‘한국사’가 그것이다. ‘큰사전’은 11년, ‘한국사’는 7년이 걸리는 대역사(大役事)였다.



막상 책을 만들려 했지만 출판사로 들어온 원고는 열에 여덟이 문맥이 통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는 원고도 허다했다. 이 때 출판사의 편집자들은 뜻이 흐르도록 문맥을 고치고, 교정을 보았다. 사실 우리 말을 이토록 가꾼 것은 누구일까. 그것은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갈고 닦아 놓은 언어가 존재했기에 저자들은 비로소 집필을 할 수 있었다. 이름 모를 장인들, 우리 말을 사랑했던 애국자들. 하지만 출판인은 잊혀진다. 기억되는 것은 저자뿐이다. 정작 모든 것을 책 속에 쏟아넣지만 출판인들은 소모품처럼 스러져 간다. 그런 숨은 일꾼들을 알아본 것이 정진숙이었다. 아호인 ‘숨은 돌’은 그러한 출판인생을 예고한 것인지 모른다.


오늘도 출판인들은 혼신의 힘으로 책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출판된 책들은 독자 곁에 가기가 쉽지 않다. 서점보다 창고에 누워있는 책들이 더 많다. 그럼에도 책을 만든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팔리지 않아도 아이를 낳듯 책을 펴낸다. 자부심은 하늘을 찌른다. 산고가 심하면 희열은 더 크다. 문화일꾼‘숨은 돌’들이 있어 우리 말이 빛난다. 지혜가 번쩍인다. 은석교에서 서향(書香)을 맡아본다.

최용대 발행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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