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隨筆)

동서고금의 내로라하는 수필 작가들은 수없이 많지만 ‘수필’을 주제로 명수필을 남긴 이는 피천득 선생이 유일할 것 같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에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피천득의 수필집 ‘수필’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76년 4월. 범우사가 ‘범우수필문고’ 첫 권으로 펴내면서 국내 독서계의 수필 붐을 선도했다. 그의 수필은 특히 고속버스나 기차 여행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주마간산으로 바깥 경치를 보며 틈틈이 읽어가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깊은 사색에 빠져들곤 했다.
수필(隨筆)이란 말 그대로 생각나는 대로, 붓가는 대로 견문이나 체험, 또는 의견이나 감상을 써내려간 글이다. 흔히 에세이나 미셀러니의 번역어로 생각하기 쉽지만, 동양에선 오래전 수필이란 말이 등장했다. 중국에서는 남송의 홍매가 쓴 용재수필(容齋隨筆), 한국에서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수록된 일신수필(日新隨筆)이 효시다. 수필의 종류는 일기·서간·감상문·수상문·기행문에서 논평·시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형식에 구애됨 없이 마음속에 담아둔 관념이나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자 매력이다.
한국 수필문학의 거목 피천득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났지도 20 여년이 지났다. 티없이 맑고 순수한 언어,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섬세한 통찰, 소박한 소재와 언어로 인생의 깊이와 향기를 담아내는 기품, 신록처럼 펼쳐지는 언어의 건축물…. 그의 수필에 대한 찬사는 끝이 없다.
피천득의 수필은 러시아어판으로도 출간된 그의 대표작 ‘인연’에서 보듯 사회 문제나 시대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 역시 생전에 저항운동, 사회참여가 필요했던 시절 한 걸음 나가지 못하고 이기적으로 살아온 자신이 부끄럽다고 토로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수필은 곡절 많은 세상을 살아온 모든 이들에게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내면을 성찰케 하는 놀라운 마력을 발휘했다.
“선생의 수필은 남에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자기를 위한 소꿉놀이 같은 순수한 것이어서 위조지폐를 대량 찍어내는 오늘의 작가와는 다른 기쁨과 희망을 준다”(최인호)는 평가처럼, 온갖 사치와 위선의 언어로 오염된 오늘의 지식사회에서 그의 빈자리는 너무도 공허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