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장소 ㊲] 어떤 일의 순서, 절정은 언제나 너무 짧다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6-08-08 12:58

남해에서 여고 다닐 때 우리 집 수소 교미 한 번 붙인 돈은 자취하던 내 한 달 생활비

남녀관계와 성교육에 대해서도 눈 뜨게 되었는데...

어떤 일의 순서 


임창아

 

남해에서 여고 다닐 때

우리 집 수소 교미 한 번 붙인 돈은

자취하던 내 한 달 생활비였다

덤으로 나는

남녀관계와 성교육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눈 뜨게 되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귀하신 수컷은 제법

비싸게 놀 줄 알았다

암컷이 적극적으로 들이대면

공연히 꼬리 흔들어 쇠파리를 쫓거나

엉덩이 슬슬 피해 가며,

음부가 더부룩한 암컷 몸 달군다

그러다 어지간하다 싶을 때 한 순간

사정없이 올라타는 수컷,

9회 말 끝내기 안타처럼

한 방에 해결하는 그 저력,

놀란 암컷은 후들거리는 다리 사이로

염치없이 질금질금 물똥 싸 재끼지만

절정은 언제나 너무 짧다

그처럼 어떤 일에도 순서는 있는 법,

사정 끝내고 암컷 골고루 핥아주는

수컷의 신사적 마무리까지

저 말없음의 예의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남해 꽃무릇 명소 앵강다숲에서 바라본 바다 풍경이 시는 경남 남해 출신으로 대구에서 활동하는 임창아 시인의 등단작이다. 신인의 시로서는 매서울 정도로 도발적이다. 


첫 행부터 “남해에서 여고 다닐 때”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이 시의 남해는 바다가 아니다. ‘우리 집 수소’, ‘교미 한 번 붙인 돈’, ‘자취하던 한 달 생활비’는 남해라는 농촌의 생활경제를 구체적으로 불러낸다. 


남해는 소 한 마리의 몸값과 여고생의 한 달 생활비가 같은 저울에 올라가던 생활의 장소다. 남해에서 여고를 다닌 화자는 학교의 교과서보다 먼저 축사의 소들에게서 몸의 질서와 생명의 본능을 배운다. 아름다운 풍광 대신 쇠파리가 날고 소의 꼬리가 흔들리는 자리, 그곳에서 남해는 한 소녀가 어른의 세계를 처음 엿본 생생한 성장의 교실이 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장소가 화자에게 일종의 ‘교과서 밖의 교실’이 된다는 점입니다. 여고생이었던 화자는 집에서 키우는 소의 생태를 지켜보며 남녀관계와 성에 관한 세계를 자연스럽게 알아갑니다. 학교에서는 배우기 어려웠던 몸과 생명의 질서를 축사의 풍경을 통해 먼저 배운 셈이지요. 그래서 이 작품에서 남해는 유년과 성년의 경계, 인간과 동물의 세계, 생계와 성(性)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성장의 장소가 된다.


경산남도 남해군의 앵강만 일대 풍경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남해의 자연경관을 거의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다도 섬도 푸른 산도 없다. 대신 소, 쇠파리, 꼬리, 축사의 기억, 자취 생활비가 남해를 구성한다. 흔히 남해를 아름다운 바다의 풍경으로 묘사하는 시들과 달리, 이 작품은 남해를 사람과 가축이 함께 먹고살던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복원한다.


삶의 체험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시의 근원이라는 명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수작으로 등단할 때부터 보기드문 걸출한 신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정호승 시인은 임창아 시인에 대해 “시를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사물과 현상이 내포하고 있는 시적세계를 예리하게 칼로 도려낸 듯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수소를 교미시킨 대가로 받는 돈과 시적화자의 삶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어떤 일의 순서」는 전체적으로 지극히 산문적으로 형성돼 있으나 ‘일의 순서’라는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은유의 획득에 성공하고 있다.”면서 “삶의 체험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시의 근원이라는 명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수작이 아닐 수 없다.”는 평을 덧붙였다.


또 정끝별 시인은 “능청과 정곡, 치밀과 분방, 집중과 방출, 통찰과 유머가 버무려진 맛깔스런 시편들은 녹록치 않은 시의 경지를 펼쳐 보이고 있다.”면서 “성과 삶을 굴비처럼 줄줄이 한 쾌로 엮어내는 「어떤 일의 순서」의 천연덕스러운 시적 절제는 깔끔하다.”고 강평한 바 있다.


임창아 시집『즐거운 거짓말』

아동문학가이기도 한 임창아 시인은 2004년《아동문예》를 통해 동시로 먼저 등단하고, 2009년 《시인세계》에 시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즐거운 거짓말』과 동시집 공저 『구름버스 타기』 등이 있다.


임창아의 시들은 과거의 기억들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그것이 어떻게 현재를 만드는 힘으로 작동하는지를 보고한다. 어떤 시편들은 노골적으로 과거를 향해 있다. “남해에서 여고 다닐 때”(「어떤 일의 순서」)라거나 “갈래머리 여고시절”(「주름잡던 시절」), 혹은 “셋방 한 칸이 신접살림 전부였을 때”(「서울과 칸나」) 같이 회고조 문장의 시편들은 시의 화자가 지나간 시절, 망각과 기억이 반반 섞인 시간대에 서성이고 있음을 암시한다. 


경상남도 남해군에 위치한 가천 다랭이마을 전경

아무나 어울리는 자기

 

임창아

 

자기가 좀 해 주면 안 될까,

처음 본 그가 나를 자기라 부르네 그러니까

그가 담긴 내 눈동자에 어린 연잎같이

두근거리는 이슬이 돋네

 

수단 좋고

묻어가는 재주 있고

밀어붙이는 모험을 가진 자기,

마치, 모든 것의 십자가라도 되는 양

없는 죄도 용서 되네

 

알아도 자기, 몰라도 자기,

자기를 연발하며 자기를 감추네

자기를 앞세워 자기를 숨기네

 

소유할 수 없으나 소유권을 가진,

언제 남인 적도 없었지만

남이 아님을 증명하는

자기라는 말 속엔 정체불명의 영혼이 있네

박상봉 사회부장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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