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선사

한국의 다도(茶道)를 중흥한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는 유·불·선을 넘나든 폭넓은 교유를 통해 조선 후기 침체된 불교계에 실사구시 바람을 불러일으킨 인물이기도 하다. 15세에 출가한 그는 환속할 마음으로 한양을 찾았다가 남산의 고갯마루에서 쉬던 중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솔뿌리가 바위벼랑을 뚫고 길게 뻗어내린 것을 보고는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발길을 돌려 좁은 암굴에 들어갔다. 수행을 마친 그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서화, 다도, 장담그는 법 등 실생활 속의 수행을 추구했다.
그런 초의에게 도량역할을 한 것이 16년간 유배생활을 한 정약용(丁若鏞)의 다산 초당이었다.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며 유학과 시학을 배운 초의는 “하늘이 맹자 어머니 같은 이웃을 내려주셨다”고 칭송할 만큼 다산을 존경했다. 실학에 열중하던 다산도 사제관계를 떠나 선과 다도에 몰두하는 초의의 구도자적 자세를 존경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동갑내기인 추사 김정희(金正喜)와의 애틋한 우정이다. 초의는 제주도로 유배간 추사를 위해 그가 좋아했던 차와 서신을 보내 위로했다. 그는 추사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친 나머지 세차례나 제주도로 직접 건너가 차와 학문을 논하며 우정을 쌓았다. 초의가 다녀간 다음 추사는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완성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차가운 계절이 지난 연후에야 그 절개를 알 수 있다는 공자의 말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학파의 거두 정약용, 명문대가 출신의 유림 김정희, 그리고 초의선사가 비록 출신배경이 제각각이었음에도 시서화차(詩書畵茶)를 통해 의기투합한 것은 경전이나 교리, 공론에 집착하지 않고 편견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전남 무안군이 삼향면 왕산리 초의선사 탄생지에 22억원을 들여 초의선원을 건립, 개관식을 가졌다고 한다. 격동의 세계사가 시작되던 18세기 초 세 사람이 엮어낸 품격높은 우정과 실사구시 정신은 이념·종교 등 갈등의 벽으로 둘러싸인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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