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의 졸업에 부쳐

세상이 지방선거 소식으로 뒤숭숭한 터에 이 지면에 난데없이 조카의 졸업에 대해 쓰자니 송구할 따름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사가 뒤엉켜도 어김없이 돌아오는 계절처럼 학생들은 2월이 되면 졸업을 하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인생의 다음 단계-그것이 ‘사회’가 되었건 ‘학교’가 되었건 새롭게 걸어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어려우며 삶이 고통스러운 만큼 우리는 우리 공동체의 미래와 그 미래를 짊어질 젊은 구성원들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졸업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졸업은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말은 참으로 아름다운 잠언이다. 공부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새로운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는 졸업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나, 영어로 졸업을 뜻하는 단어인 ‘commencement’가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언급은, 그럼에도 졸업식의 단골 멘트여서 식상하기조차 하다.
모든 것들이 그런 것처럼 아무리 아름다운 경구도 한국의 교육시스템과 사회시스템을 만나면 여지없이 파괴적으로 변한다. “졸업은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말을 초·중·고교에서는 선행학습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며, 2월의 캠퍼스는 이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온 고교생들로 넘쳐난다. 사실 취직한 대학 졸업예정자들은 기말고사를 치기도 전에 회사의 부름을 받고 인턴과정을 시작한 지도 두어달 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졸업보다 그다음 단계”가 더 중요한 것이다. 누구도 더 이상 무엇을 얻고 졸업하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어디로 향할 것인지에만 관심이 있다.
조카의 경우에는 아직 ‘다음 단계’가 정해지지 않아 졸업을 과연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어디로 갈지도 막연한 상황에서 본인이 학교를 떠나기는 싫지만 부모님과 가족의 큰 기대와 쉽지 않은 형편에서 우선 졸업을 하고 취업 재수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취직이나 진학에 성공하고 이미 다음 단계로 가 있는 친구들과는 달리, 조카는 학생도 아니고 사회인도 아닌 신분으로 어제의 그 도서관에서 어제의 그 책을 졸업식날 혼자서 들여다볼 계획이라고 한다.
구체성을 제거하면 누구에게도 새롭지 않을 그 대화에서 가장 아팠던 부분은 조카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정말 저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정치개혁과 경제활성화와 평화 정착과 여러 변화의 입법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숱한 청년 담론과 정치에 대한 논쟁 속에서 정작 이 공동체를 물려받을 이들의 행복에 대해서 과연 우리가 제대로 고민해 본 적이 있었던가. 열심히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다보면, 훌륭한 지도자들을 선출하고 더 나은 정치시스템을 구축한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그런 빈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과연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응답하라 1970ㅡ1990>이 복구하려 한 과거 중 가장 인상 깊었고 리얼했던 것은 버스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주변의 서 있는 사람들에게 “가방 들어드릴까요?”라고 묻고, 서 있는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앉은 이들에게 가방을 내려 맡기는 장면이었다. 적어도1970ㅡ 1990년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자리에 앉은 이들이 감히 묻지 않고, 서 있는 이들은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채로 끊임없이 휴대폰만 들여다보면서 곁눈질로 빈 좌석을 찾아 헤매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1970ㅡ1990년이 지금보다 나았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적어도 우리는 같은 버스를 타고 있다는 연대의식을 잃은 것임에는 틀림없다.
산다는 것이 쉽지 않고 인간은 고독하다는 것, 사회가 만만하지 않으며 그곳에서 필요한 기술을 미리 학교에서 습득해 무장해야 한다는 것, 그 이상을 우리는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을까. 개인은 고독하지만 같은 여정을 가는 사람들이 있고, 저마다 무겁기 짝이 없는 각자 삶의 가방들을 들고 있지만 때로는 손을 뻗어 그 가방을 들어줄 수도 부탁할 수도 있다는 것,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숙고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정치와 제도의 개혁뿐 아니라 마음과 연대의 네트워크 또한 더 나은 공동체와 삶의 필요조건이라는 것, 이런 것들을 학교에서 깨닫고 체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캠퍼스나 학교에서의 작은 여정이 끝나는 날, 자신과 주변의 성장을 같이 기뻐하고 축하하며 아쉬운 교문을 걸어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조카는 졸업식장에 나타날 것인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삼촌의 글을 보고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다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그때 미처 못한 축하의 말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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