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란 무엇인가

1976년 대학 신입생 면접 때였다. 백발 노교수께서 내게 어떤 철학책을 읽었는지 질문한 다음 ‘가정 형편은 어떤지’ 물었다. 당혹스러웠다. ‘인생 해답을 찾겠다고 대학에 왔는데!’라는 치기 어린 실망감이 컸다.
나이를 먹어야 깨닫게 되는 삶의 진실이 있다. 대학원에 진학하자 노교수님 말씀이 갈수록 뼈아팠다. 사회학 같은 기초 학문이나 순수 예술이 직업일 땐 교수·교사가 되는 것 말곤 생계가 막막한 게 동서고금 공통된 현실이다.
쇼펜하우어(1788~1860)는 거상(巨商)이던 부친의 재산을 상속받은 행운아였다. 일하지 않아도 유족한 학자로 살기에 충분했다. 선대의 막대한 재산이 낭비되지 않고 천재의 탄생에 기여한 드문 사례다.
운 좋게 취직해도 평생 학교와 연구실에 머문 학자는 세상 물정에 어두울 가능성이 높다. 순수 학문과 부(富)는 서로를 차갑게 외면한다.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학자들이 생생한 증거다. 주식 투자에 실패해 재산을 탕진한 고전 경제학자들 얘기도 전해진다. 학자가 이재에 밝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쇼펜하우어는 전혀 달랐다. 주거래 은행에 보낸 편지에서 ‘철학자라고 다 바보는 아니다!’라며 사자후를 토한다. 자기 자산 3분의 1을 관리하던 은행이 지급 불능을 선언하자 강력히 항의한 것이다. 능란한 밀고 당기기로 결국 그는 다음 해 전액을 돌려받는다.
쇼펜하우어는 자산 관리에 정성을 쏟았고 ‘돈’의 중요성을 십분 강조했다. ‘인간의 숙명인 힘든 부역으로부터의 해방’인 ‘경제적 자유’를 선사하는 돈을 최대한 활용한다. 쇼펜하우어는 물려받은 돈을 기반 삼아 각고의 철학적 성취로 인류에게 채무를 갚았다는 자긍심이 컸다.
독립적 생계가 자유인의 근거라는 말은 진정 옳다. 학문과 예술을 하기 위해서도 일정한 수입이 필수다. 그러나 ‘학자로 먹고살지 않고, 철학자을 위해 살았다’고 자부한 쇼펜하우어가 ‘철학으로 밥벌이하는 철학 교수들’을 비난한 건 궤변에 불과하다. 교수도 강의 노동과 연구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일과 근로자·자영업자가 하는 일은 본질적으론 다를 게 없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일세의 스승이 된 대학자다. 평생 겸손하고 청렴한 공경(恭敬)의 삶을 실천한 퇴계가 사실 대지주였고 이재에도 치밀한 선비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퇴계가 고위 관직을 거듭 고사하고 고향으로 물러나 학문을 닦고 후학을 기를 수 있었던 데는 물적 토대가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돈을 중시하는 배금주의 성향이 높다는 통계가 있다. ‘돈 놓고 돈 먹기’식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을 맹렬히 질타하면서도 돈을 갈망하는 자기 분열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허구적 청빈(淸貧) 신화에 매몰된 지식인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청빈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게 청부(淸富)다. 약육강식의 세계인 시장에선 역설적으로 신용과 정직, 창의성이 함께 자란다. 경제에 어두운 ‘바보’는 견실한 생활인일 수 없고 좋은 학자이기도 어렵다. 어릴 때부터 규모에 맞게 소비하고 저축하는 습관을 익혀야 한다. 경제는 곧 경세제민(經世濟民·세상을 다스리고 사람을 살림)이기 때문이다.
치기 어린 철학도 시절엔 삶의 진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깨달음은 항상 뒤늦게 오지만 그나마 ‘시장의 철학’이란 졸저로 남았다. 돈은 몹시 더러우면서도 가장 깨끗한 재화다. 땀 흘려 번 돈으로 꾸려나가는 정직한 살림살이는 삶의 근본이다. 경제적 자립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인 것이다. 돈과 밥벌이의 지엄함을 감당해야 진짜 어른이다.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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