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여공의 붉은 댕기
낮에는 뙤약볕 아래서 밭매고 밤에는 희미한 등불 밑에서 실 잣고 베를 짠다. 노래를 부르며. 박경리의 <토지>와 권정생의 <한티재 하늘> 같은 문학 작품에 그려진, 한 세기도 전 이 땅의 여성이 일했던 모습이다. 차별받고 핍박당한 삶이었지만, 여성의 생명력은 많은 외침과 재난, 학정 속에서도 조선 팔도강산 골골을 지탱한 힘이었다.
영화 <조선인 여공의 노래>에도 실 잣고 베 짜는 여성이 나온다. 하지만 이들의 노동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고향 집 베틀이 아닌 이국의 방적기계 앞에서 일했으며, 철조망이 둘러쳐진 공장 담장에 갇혀 살아야 했다. 저임금에 채무 노예로 전락하기 일쑤였으며, 밤샘 작업 중 졸다가 실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매를 맞았다. 강제징용이 시작되기 전인데도 그랬다.
영화는 1910년대부터 조선을 떠나 일본 오사카 방적공장에서 일한 10~20대 여성들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본주의 산업화를 시작한 일본에 식민지 조선은 저임금 노동력의 저수지였다. 조선인 여공은 민족·젠더·계급 차별이 겹친 최하층민이었다. 재일동포 사학자 김찬정이 1983년 남긴 동명의 기록, 생존 할머니 인터뷰, 재일 4세 배우들의 재연 연기로 100년 전 일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여성이 피해자였다’고만 하고 끝내지 않는다. 식민지와 자본주의 근대라는 차원이 다른 수탈 구조하에서 여성이 버텨낸 힘은 노래, 우정 그리고 자존심이었다. 특히 이원식 감독은 여공들이 1930년대 초 벌인 파업에 주목했다. 이들은 일본인과의 임금 차별 해소, 휴식시간 보장 등을 요구했다. 파업은 일본 경찰, 조선인 폭력배에게 처참하게 진압됐다. 온몸에 상처를 안고 공장에 복귀하는 여성들의 머리에는 붉은 댕기가 매여 있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말하진 않는다. “결코 지지 않으려 했다”는 생존자 증언에 어떤 뭉클함이 느껴졌을 뿐이다.
이것은 독립운동 같은 거대 서사의 렌즈에 잘 포착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산 대다수 민중의 삶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50년 뒤 청계천 피복공장 여공, 그로부터 또 50년이 흐른 뒤에도 차별과 착취에 맞서는 이주노동자의 삶도. 더 주목해야 할 과거사는 이런 것 아닐까.
최용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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