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륜범죄와 세종.
조선의 형벌제도는 동시대 다른 국가에 비해 관대한 편이었다. 가장 무거운 형벌인 참형도 만물이 생동하는 춘분부터 추분 동안은 형을 집행하지 않고 법으로 유예했다. 강상대역(綱常大逆·부자, 상하 등의 윤리를 어지럽히거나 왕권을 범하는 행위)의 중대 범죄는 예외였다. 이 경우 법에 구애받지 않고 바로 처벌했다. 이를 부대시참(不待時斬)이라 한다.
1428년(세종 10년) 9월 진주에서 김화(金禾)라는 자가 아버지를 죽이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김화살부사건'이다. 실록에 의하면 형조 보고를 받은 세종은 깜짝 놀라 "계집이 남편을 죽이고 종이 주인을 죽이는 것은 혹 있는 일이지만, 제 아비를 죽인 자가 있었더냐"면서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로다"라고 크게 자책했다. 판부사 허조가 나서 "신의 나이 이미 60세를 넘겨 50년 동안의 일을 대강 아옵니다만 이런 일은 없었사옵니다. 반드시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형조가 "율에 따라 능지처참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임금이 "그대로 시행하라"고 명했다. 김화는 부대시참을 받았다.
조선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그런 조선 사회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반인륜적 패륜범죄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세종은 신하들을 소집해 우매한 백성들을 교화할 대책을 논의했다. 변계량이 "청컨대 효행록 등의 서적을 널리 반포해 백성들이 이를 항상 읽고 외우도록 하여 스스로 효행을 깨치게 하소서"라고 주청했다. 이에 임금은 직제학 설순에게 명해 윤리·도덕 교과서 제작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432년 편찬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이다.
책은 군신, 부자, 부부의 삼강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 112명, 효자 110명, 열녀 94명의 행실을 실었다. 이 중 대부분이 중국 사람이고 우리나라는 충신 6명, 효자 4명, 열녀 6명이다.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하려다 보니 소개된 사례들은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충, 효, 열을 내세운 무수한 자해와 자살, 심지어 자식 살해 시도까지 정당화했다. 이 때문에 '약자에게 가해진 도덕적 폭력'이라는 견해가 일각에서 제기된다.
세종은 친절하게 사례별로 그림까지 그려서 첨부했으며 담당 관청을 정해 학식 있는 자를 뽑아 책을 가르칠 수 있도록 지시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겠다는 세종의 집념은 결국 1433년 훈민정음 창제로 이어진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든 후 신하들에게 그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라고 하교해 한글 교화서 제작이 훈민정음 반포의 주된 이유 중 하나였음을 밝힌다. 실제 성종 때인 1481년 세종의 유지를 받들어 한글로 뜻을 풀어 쓴 언해본을 만든다.
요즘 뉴스 보기가 두렵다. 얼마 전 30대 남성이 재혼한 친어머니의 일가족을 살해하고 해외로 달아났다가 붙잡혀 국내로 송환됐다. 40대가 재산 문제로 노부모를 둔기로 살해하고 "잔소리가 심하다"고 어머니를 죽인 일도 있었다. 실종됐던 5세 여아는 친부에 의해 살해·암매장됐던 것으로 수사 결과 드러났으며, 젖먹이 아들을 때려 숨지게 한 뒤 베란다에 시신을 방치한 30대 엄마가 긴급 체포되기도 했다.
통계는 더 참담하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 살해는 전체 살인사건의 5%를 차지하며 그 수는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영국은 그 비율이 1%, 총기 소유가 합법인 미국은 2%라고 한다. 한국이 미국보다 2.5배, 영국보다 5배 높다는 얘기다. 존속살해죄는 일반 살인죄보다 형량이 무겁다. 그렇지만 패륜범죄를 막는 데는 거의 무용지물이다. 도대체 무슨 문제로 개인주의가 만연한 영미보다 우리 사회에서 친족범죄가 이처럼 심각한지 정확히 짚어내는 전문가를 아직 못 봤다. 백성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훈민정음까지 창제한 세종의 열정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최용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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