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탈미술관 50주년 특별전…한국미술을 '0'에서 다시 묻다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등록 2026-10-13 14:41

전쟁·재난으로 불확실성 커진 시대…'난세 속 예술의 역할' 질문


작가 67명(팀) 참여…8개 구역에 42개 '쇼윈도' 구성


토탈미술관 전경토탈미술관 전경 [토탈미술관 홈페이지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저울 위에 바위라 할 만한 큰 돌이 올라가 있다. 하지만 저울 바늘은 무게가 없는 상태인 '0'을 가리킨다.


돌의 무게가 사라진 것인지, 무게를 측정하는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곽덕준의 저울 작업은 무언가를 측정하고 판단하는 기준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0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숫자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기존의 기준을 내려놓고 다시 출발하는 리셋의 의미도 담고 있다.


곽덕준 저울 작업곽덕준 저울 작업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서울 평창동 토탈미술관에서 오는 16일부터 열리는 개관 50주년 특별전 '한국미술 0년: 42개의 이야기' 전시 전경. 2026.10.13. laecorp@yna.co.kr


한국 최초의 사립 현대미술관인 토탈미술관이 개관 50주년을 맞아 오는 16일부터 특별전 '한국미술 0년: 42개의 이야기'를 연다. 작가 67명(팀)이 참여하는 이번 전시는 8개 구역에 42개의 '쇼윈도'를 구성해 서로 다른 시대와 맥락의 작품을 연결한다.


지나온 역사를 시간순으로 정리하는 회고전이 아니라 한국미술을 바라보는 익숙한 기준을 내려놓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자리다. 전시를 관통하는 질문은 '난세 속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다.


전시를 기획한 이영철 큐레이터는 "'한국미술 0년'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라며 "전쟁과 재난 등으로 불확실성이 커진 시대에 과거를 편안하게 회고하기보다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예술을 통해 지금의 난세를 돌아보고, 사람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예술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질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문형민의 '비키니 버진'과 이용백의 '피에타'문형민의 '비키니 버진'과 이용백의 '피에타'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서울 평창동 토탈미술관에서 오는 16일부터 열리는 개관 50주년 특별전 '한국미술 0년: 42개의 이야기' 전시 전경. 2026.10.13. laecorp@yna.co.kr


미술관 옥상을 꾸민 문형민의 '비키니 버진'과 이용백의 '피에타'는 폭력과 상실, 애도의 문제를 다룬다.


'비키니 버진'은 미국의 태평양 핵실험과 소비문화의 이미지를 환기하고, '피에타'는 죽은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도상을 떠올리게 한다.


핵실험을 환기하는 이미지와 피에타 도상이 한 공간에서 만나 폭력과 상실, 애도의 문제를 함께 드러낸다.


'아트냐 마트냐 아티냐''아트냐 마트냐 아티냐'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서울 평창동 토탈미술관에서 오는 16일부터 열리는 개관 50주년 특별전 '한국미술 0년: 42개의 이야기' 전시 전경. 2026.10.13. laecorp@yna.co.kr


미술관 정원에 놓인 최병수의 '미사일을 든 철판 원숭이'는 인간이 만든 파괴적인 무기를 든 원숭이를 통해 첨단 기술 문명이 인류를 야만과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그 아래에는 '아트냐 마트냐 아티냐'라는 그라피티가 적혀 있다. 예술을 뜻하는 '아트'(Art), 시장을 뜻하는 '마트'(Mart), 예술적인 것을 흉내 내는 태도인 '아티'(Arty)를 겹쳐 놓은 말로, 현대미술이 미술관의 권위와 시장 논리에 종속돼 상품처럼 소비되는 현실을 풍자한다.


심정수의 '거대한 두 발'은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연상시키며 서구 미술사의 이상을 환기한다. 몸체 없이 두 발만 남은 형상은 위대한 예술의 신화와 인간의 이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세 작품은 예술과 상업,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흔들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가치에 질문을 던진다.


전시 전경전시 전경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서울 평창동 토탈미술관에서 오는 16일부터 열리는 개관 50주년 특별전 '한국미술 0년: 42개의 이야기' 전시 전경. 2026.10.13. laecorp@yna.co.kr


아르헨티나에서 40여 년을 살았던 김윤신의 조각과 한국 무속, 기독교 도상, 퀴어 신체 등을 탐구하는 듀킴의 작품은 이주와 정체성의 문제로 시선을 넓힌다.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 신체의 경험을 담은 작품들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하나의 뿌리나 기준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 묻는다. 하와이에서 남미까지 이어지는 이동의 이야기는 국경을 넘어 살아가는 개인의 경험을 통해 한국미술의 범위를 확장한다.


이 밖에도 성능경·이건용·주재환 등 한국 실험미술을 이끌어온 작가와 차학경·박이소 등 문화와 국경의 경계를 넘나든 작가, 백남준·박서보·이강소·이승택·김구림 등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작가들이 참여한다. 서로 다른 세대와 배경의 작품을 통해 한국미술의 다양한 이야기와 시선을 보여준다.


이영철 큐레이터이영철 큐레이터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이영철 큐레이터가 13일 서울 평창동 토탈미술관에서 개관 50주년 특별전 '한국미술 0년: 42개의 이야기'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2026.10.13. laecorp@yna.co.kr


토탈미술관은 미술 애호가인 노준의 관장과 건축가 문신규 부부가 1976년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 연 토탈갤러리에서 출발했다. 1984년 경기도 장흥에 국내 첫 사립미술관을 열었고, 1992년 서울 평창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술뿐 아니라 음악과 건축, 디자인, 교육, 국제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실험과 확장을 소개해왔다.


전시는 내년 2월 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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