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박상봉
왓프라싱 앞에서 신발을 벗었다
먼 나라까지 데려온 발이 문밖에 가지런히 놓였다
맨발로 사원에 들어가
알아들을 수 없는 기도 곁에 앉았다
무엇을 빌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두 손은 오래전부터
같은 말을 알고 있는 듯했다
왓쩨디루앙의 무너진 벽돌에
풀 몇 포기 자라고 있었다
무너진 것은
모두 다시 세워야 하는 줄 알았는데
어떤 시간은
금이 간 채로 더 오래 남는다
저녁이 되자
사원으로 가던 길에 시장이 섰다
향 냄새가 빠져나간 자리
고기 굽는 냄새가 들어오고
기도하던 사람들이 지나간 길을
장사꾼과 여행자가 걸었다
나는 몇 번이나 멈췄다
사원 앞에서 망고 한 잔 앞에서
이름 모를 사람의 웃음 앞에서
여행은 멀리 가는 일인 줄 알았는데
돌아와 보니
자꾸 멈춰 서는 일이었다
신발을 다시 신고 나왔는데
치앙마이 어딘가에
아직 내 맨발 한 켤레가
천천히 걷고 있다
치앙마이 어딘가에 아직 내 맨발 한 켤레가 9월 6일. 벌써 마지막 날이다.
아침 7시,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잠시 자유시간을 가졌다. 며칠 동안 정해진 시간에 맞춰 움직이다가 생긴 짧은 빈칸이었다. 여행에서 나는 이런 시간이 좋다. 목적지가 없는 한두 시간이 오히려 한 도시를 오래 기억하게 한다.
낯선 도시에서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되는 시간.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좋고, 숙소 주변을 어슬렁거려도 좋다. 여행은 무엇인가를 보러 다니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그 도시의 표정을 더 잘 보여준다.
낮 12시, 점심으로 팟타이를 먹었다.
태국을 대표하는 볶음쌀국수인 팟타이는 이번 여행에서 만난 여러 음식 가운데 비교적 익숙한 맛이었다. 새콤하고 달고 짭조름한 맛 사이로 땅콩의 고소함이 따라왔다.
오후 1시부터 캄빌리지와 왓쩨디루앙, 왓프라싱을 차례로 찾았다.
캄빌리지에서 치앙마이의 오래된 공예와 오늘의 감각이 한자리에 놓인 모습을 보고 나서 올드시티 안으로 들어갔다.
태국 치앙마이 올드타운 중심부에 위치한 왓쩨디루앙 사원의 대웅전 건물 앞. 화려한 금빛 조각이 새겨진 란나 양식의 지붕과 굵은 흰색 기둥이 조화를 이루는 전통 건축 양식을 띄고 있다.
왓쩨디루앙(Wat Chedi Luang) 사원 앞에 섰을 때는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도이수텝의 황금빛 불탑이 하늘을 향해 빛을 올려 보내는 곳이었다면, 왓쩨디루앙은 오히려 시간을 땅 쪽으로 내려놓고 있는 듯했다.
수백 년을 견딘 거대한 벽돌 불탑은 일부가 무너진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사람은 무너진 것을 보면 다시 세우려 한다. 깨진 것은 붙이고, 사라진 것은 복원하고, 기울어진 것은 바로 세우려 한다. 그러나 어떤 것은 무너진 채 남아 있을 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갈라진 벽돌 사이에 풀이 자라고, 모서리는 세월에 닳아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오래된 사원을 본 것이 아니라 시간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왓쩨디루왕 사원은 수백 년을 견딘 거대한 벽돌 불탑은 일부가 무너진 모습 그대로 서 있다. 갈라진 벽돌 사이에 풀이 자라고, 모서리는 세월에 닳았다.
태국 치앙마이에 위치한 세계 최초의 은 사원인 왓 시수판(Wat Sri Suphan)이다. 우알라이(Wua Lai) 은공예 거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은과 주석을 활용해 정교하게 장식된 독특한 은빛 대웅전이 유명하다. 전통 란나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경내 본당(우보솟)의 화려한 은공예 장식과 조각들을 감상할 수 있다.
왓 부파람(Wat Buppharam) 사원. 1497년에 세워진 유서 깊은 사원으로, 화려한 목조 장식과 독특한 지붕 양식이 특징이다. 정교한 불교 건축물과 하얀색 탑(체디), 그리고 독특하게도 도널드 덕 동상 등이 있어 볼거리가 다양하다.왓 프라싱은 또 달랐다. 왓 프라싱(Wat Phra Singh)은 태국 치앙마이 올드타운 서쪽에 있는 치앙마이 3대 사원 중 하나로, 1345년 란나 왕조의 파유 왕이 세운 유서 깊은 사원이다.
‘프라싱’은 사자 모양의 불상을 뜻하며, 신성한 사자의 사원으로 불린니다. 태국 북부 전통적인 란나 건축 양식의 진수를 보여주며, 화려한 황금빛 탑(쩨디)과 정교한 목조 장식이 특징이다. 사원 내 ‘위한 라이 캄’ 예배당에 모셔진 프라싱 불상은 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불상 중 하나다. 평소에는 모조품이 전시되며, 진품은 매년 4월 송크란 축제 때만 공개된다.
오래된 란나 왕국의 시간을 품은 사원답게 황금빛과 붉은빛이 화려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차분해졌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사원 안에 들어갔다.
불상 앞에 앉아 두 손을 모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기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족의 건강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안녕일 수도 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소원 하나일 수도 있다. 말은 달라도 기도하는 사람의 표정은 비슷하다.
태국 마사지는 몸을 문지르는 일보다 접고 펴는 일에 가깝다. 마사지사가 팔과 다리를 당기고 몸을 비틀 때마다 굳어 있던 관절 사이로 여행의 피로가 빠져나갔다.
오후 4시, 여행에서 두 번째 타이마사지를 받았다.
며칠 동안 시장과 사원과 골목을 걸어 다닌 다리가 마사지사의 손끝에서 조금씩 풀렸다. 여행을 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이 눈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발이었다. 눈이 본 곳까지 나를 데려간 것은 결국 두 발이었다.
한 시간 뒤 거리로 나오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후 5시, 선데이마켓으로 향했다.
낮 동안 자동차가 다니던 올드시티의 길이 저녁이 되자 사람의 길로 변해 있었다.
타패게이트에서 라차담넌 로드를 따라 왓프라싱 쪽으로 좌판이 길게 이어졌다. 조금 전 사원을 찾아 걸었던 길이 어느새 거대한 시장이 된 것이다.
토요일에도 시장을 걸었지만 일요일의 시장은 또 달랐다. 손으로 만든 작은 공예품과 옷가지, 그림과 장신구가 길 양쪽으로 펼쳐져 있었다. 음식 냄새가 골목을 건너왔고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렸다. 관광객과 현지인이 뒤섞여 천천히 흘러갔다. 나도 그 흐름 속을 걸었다.
시장을 구경하다 멈추고, 음식 냄새에 멈추고, 손으로 만든 작은 공예품 앞에서 또 멈췄다.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한 일은 어쩌면 ‘멈추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평소 너무 많은 곳을 그냥 지나친다.
치앙마이 올드시티 중심가에 자리한 프릴리 피자. 이동식 화덕을 실은 푸드트럭 형태의 피자집이다.
오후 6시, 저녁으로 트럭 화덕에서 구워낸 피자를 먹었다. 태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에 피자를 먹는다는 것이 조금 엉뚱했지만 여행에서는 그런 엉뚱함도 하나의 기억이 된다.
치앙마이 올드시티 중심가에 자리한 프릴리 피자(Freely Pizza)는 이동식 화덕을 실은 푸드트럭 형태의 작은 피자집이다. 갓 구워낸 피자를 야외에서 즐길 수 있어 치앙마이의 저녁 풍경과도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원하는 토핑을 자유롭게 골라 나만의 피자를 만들 수 있다는 점. 이날은 페퍼로니와 블랙올리브, 치즈 등을 올렸다. 뜨겁게 달군 화덕에서 짧은 시간 구워내 가장자리는 살짝 그을리고 쫄깃했으며, 녹아내린 치즈와 짭조름한 페퍼로니가 잘 어울렸다.
치앙마이에서 기억에 남는 음식 가운데 하나는 프릴리 피자였다. 처음에는 길가에 세워둔 평범한 푸드트럭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보니 트럭 위에서 장작불이 타고 있었다. 자동차가 부엌이고 화덕이며 가게인 셈이었다.
주문을 받으면 반죽을 펴고 그 위에 토마토소스와 치즈, 갖가지 토핑을 얹어 화덕 안으로 밀어 넣는다. 불길 가까이 들어간 피자는 오래 기다릴 틈도 없이 가장자리부터 부풀어 오른다. 군데군데 검게 그을린 도우와 녹아내린 치즈에서 금세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낯선 도시의 밤거리에서 화덕 앞에 서서 피자가 익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구경거리였다.
한 조각을 집어 들자 바닥은 바삭하고 가장자리는 쫄깃했다. 유명한 식당에서 먹는 음식도 여행의 기억으로 남지만, 나는 오히려 이렇게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음식이 오래 기억된다. 어디든 차를 세우면 그곳이 가게가 되고, 장작에 불을 붙이면 곧 주방이 된다. ‘Freely’라는 이름처럼 참 자유로운 피자집이었다.
생각해보면 치앙마이에서 좋았던 것도 그런 자유로움이었다. 사원과 시장을 찾아다니는 정해진 일정 사이에서도 골목 하나를 잘못 들어서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을 만났다. 프릴리 피자도 그랬다. 트럭 한 대와 작은 화덕, 몇 개의 의자만 있으면 충분했다. 여행도 어쩌면 그와 비슷한 것인지 모른다. 꼭 이름난 곳에 도착해야만 기억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치앙마이의 밤, 트럭 위 작은 화덕에서는 장작이 타고 있었다. 그 불 속에서 피자 한 판이 익어가는 동안 나는 잠시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이상하게 그 불빛이 생각난다. 어쩌면 여행이란 많이 보고 오는 일이 아니라, 돌아온 뒤에도 꺼지지 않는 작은 불 하나를 마음속에 가져오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후 8시, 공항으로 향했다.
며칠 전 설레는 마음으로 빠져나왔던 치앙마이 공항에 이번에는 돌아가기 위해 들어섰다.
밤 11시 10분.
비행기가 치앙마이를 떠났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작아졌다.
항공기 창가에서 촬영한 야간 도시의 항공뷰. 도로와 건물의 불빛이 어두운 밤하늘과 대조를 이루며 그물망처럼 펼쳐져 있다.9월 7일 오전 7시 무렵,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나흘 전 이곳에서 출발했는데 같은 공항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여행을 다녀오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사람의 눈이 아주 조금 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치앙마이 여행은 거창한 모험은 아니었다. 도이수텝에 올라 황금빛 사원을 보았고, 왓쩨디루앙의 오래된 벽돌 앞에 섰다. 찡짜이마켓과 코코넛마켓을 걸었고, 토요마켓과 선데이마켓에서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나이트바자의 불빛 속도 지나왔다.
그런데 돌아와 생각해보니 기억에 남는 것은 관광지의 이름만이 아니었다. 더운 거리에서 마신 차가운 망고 한 모금과 커피 향기, 카페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던 잠깐의 오후, 사원에 들어가기 위해 신발을 벗던 순간, 시장에서 흥정하던 사람의 웃음, 마사지가 끝난 뒤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 같은 것들이다.
여행을 떠날 때 우리는 많은 것을 보러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행이 끝난 뒤 남는 것은 본 것보다 그곳에서 잠깐 느꼈던 것들이다.
좋은 여행은 얼마나 먼 곳까지 갔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얼마나 자주 걸음을 늦추었느냐로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치앙마이는 그렇게 조금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도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