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 중 대런 애쓰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의 '권력과 진보'라는 책이 있다. 기술의 발전과 권력 관계에 대한 고찰이 담긴 책이다. 권력과 자본의 관계를 다룬 것이 '자본론'이라면 기술과 권력의 관계를 다룬 책이 '권력과 진보'이다. 하지만 투쟁적이거나 과장된 어조를 취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무덤덤한 관찰자의 시각으로 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짚어낸다.
이 책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산업혁명에 대한 해설이었다. 왜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되었는가. 이 질문은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왔고, 그에 대한 설명도 적지 않았다. 지리적으로 유리했다는 주장도 있고, 인구와 자원이 풍부했다는 해석도 있다. 높은 임금이 기계 도입을 촉진했고, 그것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주목하는 지점은 조금 다르다. 사회가 얼마나 유연했는가 하는 점이다. 계층 간 이동이 비교적 열려 있었고, 산업구조가 지나치게 경직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사람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영국의 사회 구조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연했고 사회 변화를 촉진하고 새로운 기술의 도입을 이끌 수 있는 '중간 계층'이 존재했다는 해석이었다. 결국 혁신은 기술만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얼마나 열려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사회든 경직될수록 활력을 잃고, 유연할수록 발전의 가능성은 커진다. 기회가 일부에게만 고정되어 있고, 산업의 진입과 성장이 막혀 있다면 혁신은 구호에 그치기 쉽다. 반대로 새로운 기업이 등장하고, 새로운 사람이 위로 올라갈 수 있으며, 지역에서도 기회가 만들어지는 사회라면 그 자체가 성장의 토양이 된다.
지금 한국 사회도 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스타트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가. 이른바 흙수저가 금수저가 될 수 있는 구조적 기반이 형성되어 있는가. 수도권에 집중된 기회가 지역으로도 확장되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로 수렴된다. 우리 사회는 과연 얼마나 유연한가 하는 바로 그것이다.
사회가 유연하다는 것은 단순히 분위기가 자유롭다는 뜻이 아니다. 새로운 도전이 가능하고, 실패 이후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으며, 기존 질서가 새로운 진입을 과도하게 막지 않는 상태를 말할 것이다. 혁신은 거창한 구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결국 기술을 적용하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시도를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기술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기술만으로 미래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등장해 왔지만, 그것이 사회 전체의 진보로 이어지는지는 결국 그 사회의 구조에 달려 있다. 사람들이 쉽게 도전할 수 있고,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며, 기존 질서가 새로운 진입자를 막지 않을 때 비로소 기술이 혁신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유연함이며, 동시에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힘으로 이어질 것이다.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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