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수 있는 곳
연인이 된다는 건 너와 나 사이에 해가 뜨는 일
우리 다시 맴섬에서 만날 수 있을까

맴섬
박상봉
맴섬* 앞에서 한 시간 남짓 기다렸네
해는 뜨지않고 발만 동동 구르다 왔어
우리 다시 맴섬에서 만날 수 있을까
연인이 되기 위해선 두 섬 사이에 해가 떠야한다네
연인이 된다는 건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
너와 나 사이에 해가 뜨는 일
*맴섬은 전남 해남군 갈두항의 땅끝 선착장 앞에 있는 두 개의 바위섬이다. 갈라진 섬 사이로 떠오르는 해로 인해 대표적인 일출 명소로 알려져 있다.
해남에서 쓴 ‘맴섬’이 계간『시와함께』2026봄호에 실렸다.
발끝에서 시가 피어날 때
해남을 떠나는 날,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깨어났다. 땅끝에서 마지막 아침이라 생각하니 밤새 눈을 제대로 붙이지도 못한 채, 몸보다 마음이 먼저 부스스 일어났다. 하루에 몇 번씩 오르내리던 언덕길을 걸으며 익숙해진 풍경들을 가방 속으로 하나씩 접어 넣었다. 그동안 걸었던 길이 어쩌면 이별을 위한 연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물건을 정리하고 짐을 싸면서 해남에서 지낸 석달을 되감아 보았다.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토록 많은 것을 안고 가게 되었을까. 미황사 뒤편 바위 아래 묻어두고 온 것이 있다. 목울대까지 올라왔던 말, 떨어지지 않던 눈물, 밤마다 쓰다 버린 시 한 줄, 떠나는 아침에 그것들이 자꾸만 따라왔다. 그래서, 짐칸에 몰래 나를 먼저 넣어두었다.
작년 이맘때 나는 해남에서 석달을 살았다. 한옥 마당에는 햇빛이 시간을 깎고 있었고, 담 너머 땅끝의 바람은 여전히 단단했다. 네 번째 시집 발간을 앞두고 마지막 퇴고를 하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왔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머릿속이 아니라 마음속이 너무 어지러웠다. 바쁘다는 핑계로 밀어둔 질문들이, 어느 순간 삶을 잠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주 멀리,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곳으로 자신을 스스로 유배 보냈다.
해남의 땅끝은 그런 나를 조용히 받아주었다. 처음엔 글이 써지지 않아 종일 바다만 보았고, 어느 날은 동네를 빙글빙글 돌아다니다가 해 질 녘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였고, 동네 카페에 가서 낡은 시집을 들춰보다 마음을 놓친 날도 있었다.
전남 해남 땅끝해안로 송호리 일몰 풍경
한반도의 끝자락에 있는 땅끝까지 걸어갔다. 처음에는 ‘끝’이라는 이름 때문에 땅끝이 마냥 신비한 신기루 같은 곳으로 상상했다. 하지만 땅끝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깊이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길은 끝났지만 여행은 다시 시작된다’’고 했다. 땅끝 해남은 길이 끝나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수 있는 곳이다.
한반도 최남단의 땅끝은 서울과는 천 리 길.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과는 삼천 리 거리다. 땅끝은 삼천 리 금수강산의 시작점으로 해방을 상징하는 곳. 땅끝은 사람, 자연, 문화를 이어주는 우리나라 둘레길의 시작점으로, 인생에 한 번은 가봐야 할 순례지다.
땅끝에 서면 바다가 하늘과 맞닿아 있는 광경이 펼쳐진다. 수평선 너머에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길이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마음이 한없이 넓어지는 기분이 든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새로운 길을 상상하는 것이 땅끝 여행의 묘미일지도 모른다.
땅끝전망대에 오르면 바다가 더 가까이 다가온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그 바람마저도 참을 수 없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곳에 오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땅끝에서 바라본 바다 풍경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대해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고 들었다. 그 말이 떠오르면서, 무심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바다가 이렇게 넓고,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갑자기 너무나도 실감나게 다가왔다. 그 순간, 마음도 끝없는 바다처럼 고요하고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땅끝에서 가장 강렬했던 경험은 해가 뜨고 지는 일에 마음을 빼앗긴 일이었다. 매일 해가 떨어질 즈음이면 바닷가로 달려가 일몰을 만났고, 새벽에 땅끝까지 가서 맴섬 해돋이를 맞이했다. 해는 매일 붉었지만, 조금씩 다른 붉음이었다. 나는 그 변화에 빠지듯 홀렸다.
전남 해남 미황사 뒷길 따라 도솔암 오르는 길
미황사 뒷길을 따라 도솔암으로 오르던 날이었다. 벚꽃보다 먼저 피어난 동백꽃과 이끼 낀 바위, 그리고 수백 년 묵은 듯한 고목들이 조용히 나를 맞이해주었다. 땅끝 바닷길이 갈라질 즈음, 걸어 들어간 대죽도에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 적막과 파도의 울림이 한데 어우러진 고요가 몸을 감쌌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건 시다. 내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쓰는 순간이었다.
시가 손끝이 아니라 발바닥에서 온다는 걸 배운 시간이다. 문장보다 먼저 몸이 움직이고, 문장보다 늦게 마음이 따라오는 여정. 해와 달, 나무와 파도, 매화와 동백, 산사와 바위가 시를 읊었고, 발걸음이 시가 되었다. 지금 내 발바닥엔 땅끝의 풍경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것들은 내가 지니고 갈 짐 중 가장 소중하고, 가장 무거운 것이다.
저녁마다 만난 붉은 해와의 이별이 가장 아쉬웠다. 해는 아무 말도 없었다. 물 아래로 조용히 사라졌고, 나는 등 돌려 돌아섰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그때도 해는 거기 있을 것이다. 나를 기다리지는 않겠지만, 나는 다시 그 빛을 찾아갈 것이다.
해남 땅끝마을이라는 입지 자체가 글쓰기의 완벽한 배경이었고, 풍경과 고요 사이에서 문장을 받아적게 했다. 어느 날 밤, 방 안에 등불을 켜고 묵은 시집을 펼쳐 들었다. 그 속에서 오래전 나 자신과 마주쳤고, 그 시절의 상처를 문장으로 안아주고 싶어졌다.
글쓰기란 결국 자기를 다독이는 일이라는 걸 다시금 배웠다. 땅끝 살기 한 달이 인생의 전환인지, 단지 숨 고르기였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나는 짧으나 긴 시간을 보내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살았다. 그 풍경들은 모두 내 안에 남아, 언젠가 다시 삶의 언덕길을 비춰줄 것이다. 그러하니, 땅끝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이른 아침을 그동안 숙달된 요리 솜씨로 된짱찌개를 끓여 먹고, 이불도 빨고, 청소도 하고, 분리수거까지 마쳤다. 그렇게 해남 석달 살기의 마지막을 정리하며 자취를 지웠다. 텅 빈 방은 다시 처음 그 모습이 되었다. 내가 여기 있었던 흔적은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다. 어쩌면 기억 속에서만 오래도록 남게 될 것이다.
땅끝 바닷길이 갈라질 즈음 걸어 들어간 대죽도
땅끝에서 마지막 날
미황사 뒤편 바위 아래
묻어두고 온 것이 있다
목울대까지 올라왔던 말
떨어지지 않던 눈물
첫날 밤 쓰다 버린 시 한 줄
떠나는 아침
그것들이 자꾸만 따라왔다
그래서,
짐칸에 몰래
나를 먼저 넣어두었다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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