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현진건·이상백 등과 교우
1917년 최초 문예 동인지 《거화》 발간
대구 지역에서 백기만 시인 재조명 운동 활발
대구 3·1만세운동을 주도한 항일 민족지사 백기만 시인대구 3·1만세운동을 주도한 항일 민족지사이자 초창기 한국 근대문학을 일군 개척자 백기만. 대구고보 시절 이상화·현진건·이상백 등과 교우관계를 가지면서 그들과 함께 문예 동인지 《거화》(1917)를 발간하는 등 일찍부터 시적 재능을 드러낸 시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3·1운동 당시 이상화·이곤희·허범·하윤실·김수천 등과 함께 대구지방 만세시위를 모의·주동하여 항일 민족시인으로서의 실천적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대구 3·1만세운동 이야기
3·1절이 되면 항일 투쟁으로 항거한 민족지사 중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대구 3·1만세운동을 주도한 항일 민족지사이자 초창기 한국 근대문학을 일군 개척자 백기만이다.
필자는 39년 전 1987년 3월 가톨릭신문사에서 발간하는 월간 《빛》 잡지에 백기만에 대한 글을 기고한 바 있다. 애초에는 가톨릭신문사 100주년 기념 특집으로 자매지 월간 《빛》 3월호에 3·1운동 당시 대구의 만세운동과 관련해 이상화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청탁해왔었다.
그래서 이상화에 대한 그 당시의 정확한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3·1운동 판결문의 경북지역편을 찾아보다가 이상화와 함께 대구지방 만세운동을 모의 주도한 백기만이라는 인물을 발견하게 됐다.
『대구시사』 등을 뒤적여 백기만에 대한 기록을 더 찾아본 끝에 《빛》 잡지 편집자를 설득해 백기만을 특집으로 다루게 되었다.
백기만은 대구 3·1만세운동을 주도한 항일 민족지사일뿐 아니라 한국 근대문학의 요람 《금성》(1923)을 창간하는 등 한국문학의 선구자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상화가 죽은 뒤에는 대구 달성공원 내 상화시비 건립을 위해 앞장서기도 했다.
청년시절의 백기만 시인
1902년 대구 남산동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백기만은 대구고보(大邱高等普通學校)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하였다.
대구고보 시절 이상화·현진건·이상백 등과 교우관계를 가지면서 그들과 함께 문예 동인지《거화》(1917)를 발간하는 등 일찍부터 시적 재능을 드러낸 시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3·1운동 당시 이상화·이곤희·허범·하윤실·김수천 등과 함께 대구지방 만세시위를 모의·주동하여 항일 민족시인으로서의 실천적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백기만이 황석우와 조선시인회 이사가 돼 한국 최초로 발간한 《조선시인선집》(왼쪽부터)과 《상화와 고월》, 경북작고예술가평전인 《씨뿌린 사람들》
백기만은 1951년 펴낸 《상화와 고월》에서 대구 3·1만세운동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 역사적 대사건을 대구에서는 2일 저녁에야 알게 되었다. (중략) 3일 아침 일찍이 상화를 찾았다. 나는 ‘파리만국 회의에서 민족자결이 결정된 까닭에 서울에서는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데 대구에서도 호응하여 성세(聲勢)를 올려야 하지 않겠나’하고 걱정하였다. 상화는 ‘호응해야지 호기를 놓쳐서야 될 말인가. 그러나 독립운동은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일인데 학생들이 일어나지 않고는 가능성이 없는 일일세’ 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 생각하다가 ‘자네가 고보 학생의 동원을 책임지겠다면 계성은 내가 연락할 수 있겠는데’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상화한테서 기대 하였던 말이 나오는 것이 반가워서 감격한 어조로 ‘책임지지! 고마우네’ 하고는 덥석 상화의 손을 잡아 부서져라 힘껏 쥐었다.’’ (146~149쪽)
만주 시절의 백기만 시인(가운데).
이렇게 해서 백기만은 4학년 허범을 찾아가 동의를 얻어내고 신명여학교 연락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2학년의 하윤실과 1학년의 김수천에게도 상의하여 동참할 것을 약속받았다.
그런 중에 6일 오후 이만집 목사가 상화의 사랑으로 사람을 보내어 8일이 큰 장날이니 그날 오후 1시 정각에 큰 장 복판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시위행진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문의해왔고 상화 등이 이에 찬성하였다.
3월 7일에는 상화가 선전문의 등사를 혼자 맡아서 하였고 백기만은 이곤희·허 범·하윤실·김수천 등과 함께 300매의 태극기를 박아내었다.
이때 만든 태극기를 백기만은 8일 아침 보자기에 싸서 등교하였다. 그러곤 4학년 교단 밑에 숨겨두었다가 나눠줄 생각이었다는데 그날의 거사를 짐작한 학교 당국의 감시 때문에 끄집어낼 기회가 없어 시위 장소로 출발할 때에는 그대로 버려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훗날 확인한 ‘3·1운동 판결문’을 보면 백기만은 당시 대구고보 3년생으로 1년 징역을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3년 집행유예로 5월 31일 출소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는 전도가 창창한 18세 학생이라는 점이 참작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3·1운동의 주모자로 투옥되었다가 출소한 이후로 줄곧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일경(日警)의 감시를 받았던 그는 걸핏하면 가택수색을 당하였고 하는 일마다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필자는 이런 백기만에 대한 글을 1987년 3월 가톨릭신문사에서 발간하는 월간 《빛》잡지에 최초로 기고한 바 있다. 그 이후에 백기만에 대한 신문·언론 보도와 논문 발표 등이 드문드문 이어지고 지역 사회와 학계에서는 그의 항일 정신을 기리는 연구와 현창 사업도 진행되었다.
다행스럽게도 필자는 김용락 시인과 함께 대구문화재단에서 지원하는 백기만에 관한 연구 및 현창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그 결과 백기만뿐 아니라 그의 대표 저서 『씨뿌린 사람들』에 등장하는 시인 이상화, 이장희, 이육사, 오일도, 소설가 현진건, 백신애, 화가 이인성 김용조, 음악가 박태원, 영화감독 김유영 등 근현대 문화예술인에 대한 발굴 자료를 정리, 집필하여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이라는 단행본 책자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늦었지만 백기만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대구 일원의 문화권역에서 대부와 같은 존재였던 백기만을 다시 조명함으로써 문화예술 도시 대구의 위상을 제고하고 시민정신을 드높이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대구 지역에서 백기만 시인의 재조명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2021년 발간한《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한국문화분권연구소 간).
대구 3·1만세운동을 주도한 항일 민족지사이자 초창기 한국 근대문학을 일군 개척자 백기만은 해방 후 대구 지역 언론사 주필, 논설위원으로 활약했고 4·19 후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뒤 뇌졸중으로 투병하다 1969년 8월 7일 세상을 떠났다.
1963년 향토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구시민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데 전생애를 문학과 예술에 바쳐 살아온 그가 저항시인으로서 분명 탁월한 재능을 지녔음에도 흔한 문학상 하나 수상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긴 후배 시인들이 ‘금성동인회고시화전’ 을 대구 동성로 은다방에서 열어주었다.
시화전 마지막 날에는 시화판매 이익금으로 ‘연차적인 행사인 경북문화상마저 외면당한 시집 한 권 없는 항일민족시인 목우(牧牛)에게’라는 헌사와 함께 금메달과 백미 한 가마를 전달하고 이때 참석한 음악가 권태호 씨가 독특한 바리톤 음성으로 ‘메기의 추억’을 불러 장내에 슬픈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것이 세칭 ‘대구시민문화상’ 시상식이었다.
1963년 10월 백기만 시인이 ‘대구시민문화상’을 수상하며 오열하고 있다.
백기만은 말년에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1969년 8월 광복절을 앞두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사후 56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변변한 유고시집 한 권조차 엮어내지 못하고 있다.
1920년대 한국 근대시의 서장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시인으로 백기만이 한국 문단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볼 때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과 자책으로 한 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기 그지없는 3·1절을 맞는다.
백기만 선생은 아직도 공식 서훈 없이 대구의 신암선열공원 내 미서훈 독립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1919년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친구 이상화(李相和) 등과 함께 대구 3·8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주도하였고, 이 활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당시 학생 신분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의 독립유공자 포상 기준상 통상적으로 금고 이상의 실형을 받은 기록이 중시되는데, 선생은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던 점이 서훈 심사에서 미지정 사유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선생이 남긴 위대한 업적과 헌신에 대해 마땅히 받아야 할 응당한 보답을 하고, 한국문학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아졌으면 한다.
백기만 시인이 이 땅에 뿌린 씨앗들이 봄을 불러 꽃으로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3·1절 아침에 다시금 그를 추억해보는 것이다.
문우들과 야유회 중인 백기만 시인(뒷줄 오른쪽)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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