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동백꽃 파도, 바람에 흔들리는 숲길,
해식절벽과 윤슬은 여행자의 노트에 시를 남긴다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갔더니 작년 것만 남았습디다
선운사(禪雲寺) 동구(洞口)
서정주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전북 고창의 선운사 입구에는 서정주의 시 「선운사 동구」가 새겨진 시비가 서 있다. 1968년 민중서관에서 나온 다섯 번째 시집『동천』에 수록된 이 작품은, 서정주가 생전에 즐겨 써서 지인들에게 건넸던 시로도 알려져 있으며, 일부 육필 원고는 현재 미당시문학관에 남아 있다.
이 시 덕분에 ‘동백’ 하면 선운사가 먼저 떠오르지만, 남쪽 바다로 시선을 돌리면 또 다른 동백의 왕국이 있다. 경남 거제 앞바다에 떠 있는 지심도다. 수백 년 묵은 동백나무들이 섬 전체를 덮고, 해안이 파도에 깎인 해식애(海蝕厓)로 둘러싸인 섬에는 수백 년 된 동백이 숲을 이루고 있다. 햇볕 좋은 봄날 섬에는 별이 내려앉은 것처럼 동백잎이 반짝거리고, 바다는 윤슬로 반짝인다. 그 모습은 그대로 보석섬이다. .
지심도는 거제도 일운면 옥림리(지세포)에 속하는 약 11만평 면적의 작은 섬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섬의 생긴 모양이 마음 심(心)를 닮았다고 하여 지심도(只心島)라고 불린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기록을 보면 지심도는 지사도(知士島)라 불리기도 한 모양이다. <대동여지도>에는 상록수림이 우거진 섬이라는 의미로 지삼도(只森島)라고도 하였고, 일제강점기 섬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보리섬(麥島)라고 불렀다.
지심도 여행은 거제도 장승포에서 시작한다. 배를 타고 20분 남짓 달리면 선착장에 닿고, 파도가 잦은 날이면 접안이 쉽지 않다는 절벽 아래에서 섬은 늘 긴장을 품고 있다. 운 좋게 날씨가 받쳐 주는 날이면, 섬에 발을 내딛는 순간 겨울동화가 시작된다.

바위 위에 잠든 범아 다시 한 번 일어나서 어흥 어흥 울어보렴
행여나 뉘 알손가 인어공주 찾아올 줄 천년만년 자지 말고 다시 한 번 울어보렴!
밤바위 바위숲에 미역따는 여인네야 흰 저고리 검은머리 동백꽃이 너무 고와
성창호 낚시꾼들 감성돔도 잊었는지 여인네만 바라보네
지심도 선착장에 내리면 숫호랑이와 인어공주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전하는 범바위의 전설을 먼저 만나게 된다. 범바위에 걸터앉은 인어공주가 죽은 호랑이를 천년 만년 기다리는 애절한 모습을 보면 잠시 숙연해진다.
이어 들려오는 동박새와 직박구리 울음에 귀를 기울이면 섬이 먼저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가파른 길을 오르면 ‘샛끝’과 ‘마끝’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남북으로 길게 누어있는 지심도는 북쪽 끝은 ‘샛끝’, 남쪽 끝은 ‘마끝’이라 부른다. 샛끝은 동풍 즉 샛바람이 부는 곳, 마끝은 마파람(남풍)이 부는 곳이다.
지심도는 원시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솔향기 맡으며 하늘을 걷는 듯 아찔한 재미가 쏠쏠하였다. 솔향이 진한 숲길 사이로 동백과 후박나무, 대숲이 차례로 펼쳐지고, 낮인데도 숲이 해를 가려 어두컴컴한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닿는다. 탁 트인 바다 전망이 더없이 아름다운 이곳은 사진 찍기 그만인 포인트다.
오가는 길에 일제강점기의 군사시설과 지금은 마을 회관으로 사용하는 분교 건물 등 옛 정취를 간직한 마을에선 소박하지만 내력 깊은 볼거리가 많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멀리 대마도가 어렴풋이 보이기도 한다.
선착장과 마을 사이의 비탈길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탄한 오솔길이 이어지는데, 지심도 일주도로인 이 오솔길을 따라 2~3시간만 걸으면 지심도의 진면목을 샅샅이 감상할 수가 있다. 민박집도 더러 있어 하룻밤 묵어갈 수도 있다.
전망대 바로 옆 망루는 바람맞기에 좋다. 시원한 바람이 머릿결을 스치고 봄을 부르는 바람의 향기와 함께 깨끗한 공기가 상쾌함을 더해준다.
지심도에는 대나무 숲도 만날 수 있다. 지심도 북쪽 끝자락에 이르면 곧게 쭉쭉 뻗은 대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다. 해안전망대와 망루를 거쳐 북쪽 끝의 ‘샛끝벌여’까지 걸어가면 지심도에서 떨어진 ‘동섬’, 굴이 있고 주변에 뽈락이 잘 잡힌다는 ‘굴강여’, 둥근 바위 모양 ‘높은 돌’, 반공호 자리 ‘굴밑’, 소나무가 자라는 ‘솔랑끝’, 일제강점기 군사시설 공사용 화물을 운반하기 위해 나무말뚝을 박았던 ‘말뚝밑’ 등 지명마다 갖은 사연이 녹아 있는 곳곳을 둘러볼 수 있다.
바닷가 언덕에 자리 잡은 아담한 정원 같은 숲, 탁 트인 바다 전망을 둘러보며 봄날 지심도의 동백숲을 거닐다 보면 몸과 마음에 쌓인 피로가 풀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분주한 도시 생활에 찌든 긴장과 우울을 잠시 내려놓고 숨을 고를 수 있는 곳,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회복하게 만드는 마음 치유(治癒)의 섬이 바로 지심도라고 할 수 있겠다.

마량포 동백꽃
박상봉
걸르기 일쑤인 식사
위장장애와 불면증
알코올 중독이 주특기죠
손님 안받는 날은 나이트클럽 가기
화투치기는 부업이고요
번지 없고 복지도 없는 홍등가
짐승보다 못한 사내놈들과
정붙이고 살아온 지 십삼년
꽃잎 같은 입술 다 문드러지고
곱던 얼굴 검버섯 피고
가슴은 바람 빠진 고무풍선
몸 망가지고 느는 것은 빚뿐
남은 것은 핸드백 속 아티반 한 알
찾는 남자 하나 없는 달빛 쓸쓸한 날 밤에는
열여섯 살에 잃은 순결이
저혼자 골목길 빠져나와
나의 살던 마량포 바닷가 동백나무
탐스런 꽃으로 활짝 피었다가
동백꽃보다 더 붉은 해 넘어갈 때
굵은 눈물방울 뚝뚝 떨구는 것 보았는지요

이 시에서 등장하는 ‘마량포 바닷가 동백나무’ 역시 남해안 포구 특유의 습윤한 공기와 붉은 꽃빛이 겹쳐 떠오르는 장소라고 볼 수 있다.
동백은 단지 관광의 표지가 아니라 삶의 사연을 담아내는 꽃이다. 선운사의 막걸릿집 가락과 지심도의 바닷바람, 그리고 마량포의 붉은 꽃잎은 서로 다른 장소에 놓여 있지만, 하나의 계절로 이어진다. 꽃은 아직 피지 않았는데 노래가 먼저 들리고, 섬은 아직 멀었는데 마음은 벌써 남쪽으로 가 있다. 그래서 시와 장소를 함께 읽는 일은, 지도 위의 좌표를 따라가는 여행이 아니라 감정의 위도를 옮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올봄, 동백이 만개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또 한 번 남쪽 바다를 향해 가방을 챙길 것이다.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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