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

훈민정음 해례본을 펼치면 세종의 정신 속에서 오늘의 'Think Different'를 읽을 수 있다. 한글은 천(天)·인(人)·지(地)의 원리를 따라 만들어져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이치를 문자에 담았다. 익숙한 것에서 새로움을 빚어낸 상형제지(象刑制之)의 철학은 그 자체로 놀랍다. 그래서 한글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사유의 틀이며 영혼의 언어다. 우리말의 음과 뜻은 언제나 조화를 이루고, 그 속에는 조상의 사상과 정서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쉰다. '바다'라는 말 하나에도 영어의 'The Sea'보다 훨씬 깊고 넓은 울림이 있다.
그 많은 우리말 가운데 내 마음을 오래 붙잡은 단어가 있다. 그것은 한때의 유행이나 잠깐의 감상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가만히 비추는 말, 바로 '고즈넉'이다.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 남편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불안과 고단함 속에서도 어머니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삶을 이어 가셨다. 전쟁이 끝난후 60년대 모두가 힘들고 어려웠던 어느 여름밤, 나는 잠결에 깨어 툇마루 끝에 앉은 어머니를 보았다. 모깃불의 희미한 불빛 아래, 앞산 위 초승달을 고즈넉이 바라보시던 어머니. 가끔 눈물을 옷고름에 훔치며 먼 하늘에 마음을 두고 조용히 앉아 계셨다. 오랜 세월이 흐른 그 순간, 나는 '고즈넉'이라는 말이 품은 깊이를 비로소 알았다.
사전은 고즈넉을 'quietly' 'gently'로 옮기지만, 그 말은 단순한 조용함이 아니다. 그것은 슬픔을 삼키며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자세이자,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의 상태다. 시인들이 이 단어를 사랑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김현승은 "나는 차를 앞에 놓고 고즈넉한 저녁에 호올로 마신다"고 했고, 박용래는 "고즈넉한 새벽 먼동이 트일 때"라고 읊었다. 그들의 시 속에서 '고즈넉'은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다리이며, 인간이 견뎌온 시간의 숨결이 된다.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 2악장에서 잉글리시호른이 들려주는 선율과 닮았다. 잔잔히 흐르는 음 속에 스며 있는 정적과 따스한 정서, 그 고요한 울림이 바로 고즈넉이다. 급하지 않고 허투루 흐르지 않으며, 낮게 번지는 빛처럼 마음의 주름을 펴준다.
오늘의 세상은 너무 소란스럽다. 사람들은 침묵보다 목소리의 크기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고향의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생각한다. 전쟁과 고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툇마루 끝에 앉아, 흐르는 달빛 아래 고즈넉이 세상을 품으셨다. 그 조용한 시간, 말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던 침묵 속에서 어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고 깊었다. 그 품 너머에는 세종의 생각처럼 남다른 길을 찾고자 했던 조상의 지혜와 넉넉함이 함께 흐른다.
'고즈넉'은 지금도 내 마음 안에서 잔잔히 울린다. 나는 그 말을 품기에 아직 부족하지만, 언제고 침묵의 미덕과 곧고 고운 우리말의 정신을 따라 걸으며 살아가고 싶다. 어쩌면 고즈넉은 내가 평생 배우고 싶었던 우리말의 숨결이며, 어머니와 고향이 내게 남겨준 가장 따스한 향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향기는 오늘도 내 안에서 조용히 피어올라, 바람처럼 나를 다독인다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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