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濕)’은 단순히 물기가 아니라, 세계가 나를 스며들게 하는 방식
시 쓰기는 진실이라는 견고함의 성채인 육체
시는 사유의 논리가 아니라 감각의 근육, 언어의 호흡
송재학 시집『습이거나 스페인』(문학과지성사, 2025)1986년 『세계의문학』에 「어두운 날짜를 스쳐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40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특유의 시 세계를 단단하게 확립해온 송재학의 열두 번째 시집 『습이거나 스페인』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618번으로 출간되었다.
송재학의 새 시집 『습이거나 스페인』은 ‘젖음’이라는 한 글자의 감각에서 시작한다. 그에게 ‘습(濕)’은 단순히 물기가 아니라, 세계가 나를 스며들게 하는 방식이며 현실과 꿈, 생과 사, 자아와 타자가 만나는 애매성의 장소다.
목발뼈 발배뼈 입방뼈 쐐기뼈라는 순롓길을 짚으면서 스페인을 다녀온 뒤 한동안 비에 젖거나 비를 찾아다닌 꿈이 나를 간섭했습니다 아침마다 복용하는 약병의 라벨을 뜯어내니까 다른 라벨이 숨어 있습니다 문득 내 이름이 지명이거나 당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짐작을 합니다
—「습이거나 스페인」
표제시는 육체와 감각의 언어로 세계를 다시 짜 맞춘다. 비에 젖듯이 꿈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이 시의 장면에서 ‘습’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존재의 운동이 된다. 스페인은 그 젖음이 번져간 상징적 지리다. 습의 음차 속에서 태어난 ‘스페인’은 먼 타자의 나라이자, 습이 닿을 수 있는 언어의 경계선이다. 시인은 “습이 스페인이라는 지리와 시간까지 번졌다고 변명한다”라고 말한다. 결국 ‘습이거나 스페인’은 몸의 젖음과 언어의 이동이 겹치는 좌표를 가리킨다.
감각의 윤리 — 젖음으로 사유하다
송재학은 자신을 스스로 감각주의자라 부른다. 그의 감각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스며드는 능력이다. 시집의 여러 시편은 이 감각의 윤리를 드러낸다.
“누에 암나방은 다섯 번째 탈피를 마치면 알을 낳은 뒤 입이 퇴화되어 점차 먹지 못해 죽는다”(「어떤 입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라는 구절에서, 시인은 생의 단단한 질서 속에서 죽음을 ‘다른 생존 방식’으로 본다. 감각은 그 경계를 가두는 틀이며 동시에 그 틀을 넘어 확장되는 통로다. 그에게 평범과 비범, 생존과 소멸은 같은 공간의 두 결이다.
그의 시는 늘 그 경계선 위에 서 있다. 비와 먼지, 별과 뼈, 나무의 나이테, 심해어의 눈 —모두가 젖은 세계의 사물들이다. 그 젖음 속에서 시인은 세계의 표면이 아니라 모세혈관의 진동을 듣는다.
죽음의 감각 — 순환으로서의 생
시집의 중반부를 이끄는 정조는 ‘죽음’이다. 하지만 그 죽음은 단절이 아니다. “지구에서 나는 소멸되고 정신의 복사열만이 이곳으로 옮겨와 생을 반복하고 있다”(「가니메데라는 궤도」). 시인은 죽음을 ‘우주의 되새김질’이라 부른다. 소멸은 곧 순환이고, 사라짐은 다시 시작의 신호다.
그는 “정령주의자이면서 범신론자”라 말한다. 그 말처럼 그의 죽음관은 자연의 윤회와 에너지의 재생에 닿아 있다.「섬망」과 「눈사람」, 「흰색」의 시편들에서 사라진 존재는 다시 흰색의 이미지로 귀환한다. 그 귀환은 회귀가 아니라 변형의 생명이다. 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말한다. “다시 도착하는 새들에 의해 어떤 해변은 끝이 아니라 늘 시작이다.”(「해변b」) 끝은 다시 시작을 향한 준비다.
송재학은 “시 쓰기는 진실이라는 견고함의 성채인 육체”라고 말한다. 그에게 시는 사유의 논리가 아니라 감각의 근육, 언어의 호흡이다. 시인은 언어의 육체를 해부하며 그 속에 남은 진동을 듣는다. 그가 천문학·기하학·생물학 같은 과학 용어를 시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지식의 장식이 아니라 언어의 물질성을 되살리는 일이다. ‘위턱과 아래턱 사이의 둔각을 만드는 생물학’, ‘목성 너머 푸른 점’ 같은 문장들은 시의 사유가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의 언어는 늘 살아 있는 유기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말을 ‘소리’가 아닌 ‘감각의 기관’으로 되돌리는 일, 즉 언어의 재생학이다.
번짐의 미학 — 다수의 선율로 이루어진 교향곡
문학평론가 이희우가 이 시집을 “다수의 선율로 이루어진 교향곡”이라 평한 것도 이 때문이다. 각 시는 서로 다른 주파수로 울리지만, 전체 시집은 한 몸처럼 진동한다. 습의 리듬, 감각의 전율, 죽음의 울림이 하나의 거대한 감각의 교향곡을 이룬다.
「말머리성운」에서 나무의 나이테는 별의 궤도와 맞닿고, 「부처」에서는 산스크리트와 한자가 교차하며 언어의 기원을 되묻는다. 모든 것은 서로의 빛을 반사하며 번진다. 이것이 송재학이 말하는 습의 시학, 즉 ‘스며들고 흩어지는 존재의 방식’이다.
『습이거나 스페인』은 명확함보다 흐림의 윤리, 견고함보다 젖음의 진실을 택한 시집이다. 시인은 분명한 생과 분명하지 않은 생 사이에서 언어의 젖은 껍질을 벗기고, 다시 감각의 세계로 돌아간다. 그의 시는 이성 보다 촉감이 앞서고, 설명보다 스며듦의 체험이 깊다.
송재학은 결국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가 사는 일도, 시를 쓰는 일도 모두 비에 젖거나 비를 찾아 헤매는 꿈속의 행위라고. 그리고 그 젖음 속에서 생은 자신을 스스로 다시 써 내려간다고.

박상봉
경북 청도 출생. 1981년 동인지 《국시》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물속에 두고 온 귀』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 등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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