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련, 순진, 천진난만한 채송화 시인 강남옥 시월 귀국 소식
아름답게 손 흔들어 인사하고 싶습니다
간이역에 내려 / 강남옥
더 이상 갈 수 없어 내렸습니다. 종점이 가까운데 저당 잡혀온 내일은 바닥났고 생각은 호주머니 속에서 잠잡니다. 날 저물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적막강산에 맨몸으로 뛰어든 눈발만 한없이 반가워 지쳐 때 묻은 뼈를 묻을까 잠시 비장한 궁리 합니다만, 끝없는 우리의 희망 같은 것일까요? 눈 덮인 山河 어둠의 한 끝을 녹이며 달려가는 붉은 눈시울의 차창은. 어디서 우리는 거짓 없이 절망할 수 있을는지.
며칠 이 곳에 묵으며 피차 이름 석자 건네지 않아도 낯익은 슬픔 어깨 기대어 나누어 떨 요량입니다. 남은 희망에서 춥고 흐린 날을 제한 따스한 백일몽을 셈하며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에서 또 다시 처음인 듯 해후할 날을 재촉하겠습니다. 별빛일지, 아직은 확실치 않은 얼굴들 새벽 첫차 바람 부는 플랫폼에 떠오르는군요. 저들에게 아름답게 손 흔들어 인사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서랍을 열어 주십시오. 소용 닿지 않을 유품과 길고 긴 유서에 부끄러움 전합니다. 삶과 죽음을 우롱한 죄 값은 살아가면서 차차 갚아드리겠지만 다시 만날 땐 거짓 우울에 함구하겠습니다.
그 곳에도 해가 떴겠지요. 밤이 다하면 아침이 오는 이 평범한 진리를 낯선 곳에서 눈물로 수긍해야 하다니.
지나쳐온 눈물보다 겪어야 할 즐거움 더 많다고 속삭여대는 저 눈발에 새로운 은유를 찍으며, 아, 속는 셈치고 기꺼이 속아 넘어가겠습니다. 뒤늦은 깨달음에 기대 앞세우고 마중 나와 주시길 바라면서
또 소식 드리지요.
강남옥 시인
강남옥 시인을 잘 모를 것이다. 그녀는 「간이역에 내려」라는 이 시로 198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약관 스물 아홉살 나이에 왕성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1989년 열음사에서 『살과 피』라는 제목의 첫 시집을 바로 펴내기도 했다.
「간이역에 내려」라는 이 시도 빼어난 작품이지만, 나는 「채송화」를 가장 강남옥 다운 시로 손꼽는다.
채송화의 꽃말은 가련, 순진, 천진난만이다. 이 시는 앉은뱅이 모양의 작은 채송화처럼 키 작은 여인의 가련한 짝사랑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산문시지만 은근한 음조가 전통적인 우리 정서와 가락을 오롯이 담은 수작이다.

채송화 / 강남옥
좀 알은 체해 주면 어때서 나 여기 살아 이토록 쓸쓸히
눈부시잖냐고 낮은 뜨락 환하게 꽃등 심지 돋우어도
키 큰 나무 잎사귀에 누워 거드름만 피우고,
내민 입술에 싱거운 바람만 얹어놓는 햇살이여.
그리운 눈길로 쫓아가면 마알간 물 수제비 하나 톡 떠 주고.
유월 지친 짝사랑에 눈 한번 맞추이면 화들짝 까무러치며
나는 꽃이 되곤 했지요.
강산이 세 번씩 옮겨 앉도록 곁눈질 못 배운 어리석음
부디 오셔서 오래오래 비웃어 주지 않으시련지.
키 작은 내 주소에 이름 매겨 주시면 열 손톱 아래 먹물로
문패 새겨 두렸더니, 벼랑 되짚어 오는 꿈길엔 별들만 차례로 지워 지더군요.
아, 나도 한번쯤 일어서고 싶지만 너무 오래 꿇어앉아 있었나 봅니다.
이제 남은 기다림에 저린 발을 뻗고 눈곱만한 연분으로 야물겠습니다.
그리고 목발은 문밖에 내다놓겠습니다.
비록 앉은뱅이의 짝사랑이었지만 당찬 내 눈빛 허물어질까 두려우니.

이 시를 읽고 깜짝 놀랐다. 59동인으로 같이 활동하며 시화전도 하고 문집도 내면서 그의 시를 여러편 보았는데 집중해서 읽지않은 탓도 있겠지만, 그리 눈에 띄는 작품을 본적이 없었기에 갑자기 일취월장한 뛰어난 수사력과 상상력을 보고 퍼뜩 이해가 되지않았다.
고등학교 생활이 슬슬 끝나갈 무렵 나는 박기영 등이 주도하던 59문학회에 가입해 1977년 12월 20일 시내 고려백화점 화랑에서 창립 시화전을 가졌는데 이 시화전에 김경호, 김정학, 김정희, 나문석, 서유장, 박기영, 손태도, 윤상수, 이상수 등과 함께 강남옥이 참여해 가깝게 알고 지냈다.
나중에 나와 박기영 등과 함께 국시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장정일 시인이 시운동 동인으로 가고 안도현 시인이 시힘동인으로 옮기고 난 뒤에 이정하 시인과 함께 강남옥 시인을 동인으로 새로 영입하게 되었다.
강남옥 시인은 키가 작지만 아주 당찬 여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성격도 활달했고 술도 잘 마셨다. 그녀는 나와 같은 청도 출신이다. 정화여고를 다녔고 효성여대(지금의 대구카톨릭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시에 몰입했는가 하면 그녀의 자치방 벽면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가득히 시로 도배를 해놓을 정도였다. 그런 각고의 노력으로 10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처럼 10년동안의 투고 끝에 결국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자가 된 것이다.
나와 박기영, 안도현, 장정일 등과 ‘국시’ 동인으로 활동했던 강남옥 시인은 1990년 미국 필라델피아로 이주해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다. 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현재는 미국 통신회사에서 일하는 그는 1994년부터 주말 한국학교에서 차세대들과 현지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토요일 한국학교』에는 총 55편의 시가 담겨 있다. 이중 52편이 미 발표작이다. 시집은 ‘호코 코메리카니쿠스, 그들은’, ‘필라델피아에 살다’, ‘보헤미안 랩소디’, ‘구겨진 것들에 바침’ 등 4부로 구성돼 있다.
강남옥 시인이 시월에 한국에 들리러 온다고 한다. 채송화처럼 가련, 순진, 천진난만한 키 작은 소녀, 어서 빨리 만나고 싶다.
강남옥 시집『토요일 한국학교』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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