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산책 10] 진전면 8의사 묘역에서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9-16 12:45

-청암 배성근-


팔의사 묘역 안내판


오늘은 진전면 양촌리에 있는 8의사 묘역을 찾았다. 차를 세우고 내려 주변을 먼저 둘러보았다. 눈앞에는 조용한 마을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나지막한 산자락과 숲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아직 한낮의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선선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도시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없는 곳이었다.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묘역으로 이어지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발밑의 길을 바라보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숲 사이로 묘역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비석과 묘소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고 단정했다. 묘역 앞에 서서 비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새겨진 이름을 하나씩 읽었다.


김수동, 변갑섭, 변상복, 김영환, 고묘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 여덟 분의 이름이었다. 한동안 비석 앞을 떠나지 못했다. 이름은 짧았지만 그 이름을 품고 있었을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마다 가족이 있었을 것이고, 살아온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먹고사는 일에 마음을 쓰며 하루를 살아갔을 평범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이 100여 년 전 이 땅에서 역사의 한복판을 지나갔다.


1919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던 시기, 이곳 진동·진북·진전 지역에서도 주민들이 참여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오늘날 이를 삼진의거 또는 삼진독립의거라고 부른다.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주민들은 일제의 통치에 맞서 독립을 요구하는 뜻을 드러냈고, 일제의 진압 과정에서 체포와 희생이 뒤따랐다. 그 역사적 사건을 글로 읽을 때와 직접 그 현장을 찾아왔을 때의 느낌은 달랐다.


오늘 내가 서 있는 땅이 바로 그 역사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지금은 숲이 조용하고 바람이 부드럽게 지나가는 평온한 곳이다. 그런데 100여 년 전 이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독립을 외쳤다. 나는 묘역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묘소 앞에 잠시 멈추기도 하고, 비석의 글자를 다시 바라보기도 했다.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내려와 묘역 한쪽을 비추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잎사귀 사이로 햇빛도 함께 흔들렸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바람을 그때의 사람들도 맞았을까. 100여 년 전 이 땅을 걸었던 사람들의 얼굴은 지금 볼 수 없지만, 그들이 걸었던 하늘과 산과 바람은 아직 남아 있다. 우리가 보는 풍경 가운데 일부는 그들이 보았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는 일이 소중한 것 같다. 책에서는 사건의 날짜와 이름을 배울 수 있지만, 그 땅에 직접 서면 그 사건이 남긴 시간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비석 앞으로 돌아왔다. 여덟 분의 이름을 바라보며 오래전의 삶을 함부로 상상하지 않으려고 했다. 역사 앞에서는 추측보다 기록이 먼저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분들의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이 묘역이 그분들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팔의사 묘역 표지석 및 안내문

8의사 묘역


묘역을 둘러보고 돌아서는데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비석은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숲도 그대로였고, 바람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처음 들어올 때와 나갈 때의 마음은 달라져 있었다.


오늘의 답사는 단순히 8의사 묘역을 둘러본 일이 아니었다. 내가 살아가는 창원의 가까운 곳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직접 확인하고, 그 역사를 남긴 사람들의 이름 앞에 잠시 서 있었던 시간이었다. 향토사를 찾아 걷다 보면 거창한 유적보다 오히려 이런 조용한 장소에서 마음이 오래 머문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길, 오래된 비석, 숲 사이로 스쳐 가는 바람 하나에도 지나간 시간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묘역을 나와 차에 올랐다. 출발하기 전 다시 한 번 양촌리의 산자락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오후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할 것 같다. 저 숲 아래에 역사가 있고, 저 비석에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 뒤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사람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진전면 양촌리에서 만난 여덟 분의 이름이 돌아오는 길에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향토사를 걷는다는 것은 결국 오래된 길을 걷는 일이 아니라, 그 길 위에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을 다시 만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시와늪 대표 배성근(시인.수필.펼론(비평).칼럼리스트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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