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SA 레이더, 장거리 미사일 등 첨단장비 갖춰…北에 압도적 우위"
"KT-1 '웅비' 훈련기 개발 성공으로 국산 전투기 개발 자신감 얻어"
"軍장성, 국산 비행기 개발 성공하면 자기 손에 장 지지겠다고 했다"
"무기 해외 의존보다 기술자립 나서야"…안동만 전 ADD 소장 인터뷰
[※ 편집자 주= 안동만 전(前)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 인터뷰는 내용이 많아 다섯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이 네 번째로 국산 군(軍) 항공기 개발 과정과 최신 국산 전투기의 성능을 다뤘습니다. 지난 7월 13일 송고한 첫 번째 기사는 안 전 소장의 성장 스토리와 '천궁' 지대공 미사일, 같은 달 20일의 두 번째 기사는 한국이 처음으로 무기를 만든 '번개 사업', 8월 3일의 세 번째 기사는 지대지 현무 미사일 위력을 다뤘습니다. 이들 기사의 내용 요약은 이번 기사 맨 아랫부분에 수록했습니다. 다음 주 이후에 나가는 다섯 번째 기사는 해상과 육상의 무기, 정찰위성의 위력을 다룰 예정입니다. [삶]은 자서전적 인터뷰여서 개인의 스토리와 사진 등이 많이 들어갑니다.]
KTX-1 날개 위에 올라간 ADD 연구원들과 항공업체 개발자들 이 비행기 날개의 구조적 특성 시험을 위해 20명가량이 날개 위에 올라갔으며, 당시는 시험할 장비가 없어서 이런 식으로 테스트를 했다고 안동만 전 소장은 전했다.
[안동만 전 소장 제공 사진]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 "1991년 12월 12일 오전이었습니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경남 사천 비행장에 모여 있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ADD)가 국내업체들과 함께 자체 개발한 KTX-1의 초도(첫) 비행이 예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오전 11시 55분 드디어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이륙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사람들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미사일과 달리 비행기에는 사람(조종사)이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KTX-1은 지리산 쪽으로 갔다가 사천 비행장에 무사히 안착했습니다. 이륙 38분 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감격해서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는 KTX-1 훈련기 개발을 주도했던 안동만(77) 전(前)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이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전한 내용이다.
인터뷰는 지난 6월 8일을 시작으로 일곱 차례에 걸쳐 대전시 한국무기체계안전협회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그는 인터뷰에서 "KTX-1(그후 KT-1)의 성공은 우리도 전투기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줬다"면서 "그 전에 어떤 공군 장성은 우리가 비행기 개발에 성공하면 자기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안 전 소장은 "KTX-1의 성공을 바탕으로 한국은 국산 항공기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올해부터 4.5세대 국산 전투기 KF-21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KF-21은 미국의 최강 전투기 중 하나인 F-35와 비교하면 스텔스 기능 외에는 별로 부족한 게 없다"면서 "AESA(능동전자주사식 위상배열) 레이더를 비롯한 첨단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적기가 100㎞(서울시청∼충주시청 거리) 밖에 있더라도 빠르게 포착해서 3분 안에 격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2008년 KA-1 조종석에 앉은 안동만 당시 ADD 소장 KA-1은 기본훈련기 KT-1에 무기를 장착한 경공격기다 [연합뉴스 사진]
외가가 있던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 태어난 안 전 소장은 경북중과 경북고를 졸업했고, 서울대 항공과와 미국 노스롭대 대학원을 거쳐 영국 크랜필드 대학교에서 항공 분야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 ADD에 입소한 그는 1984년 미사일구조연구실장, 1990년 항공기술부장, 2000년 항공·유도무기개발본부장을 지냈다. 2003년부터 방위산업과 무기개발을 총괄하는 국방부 연구개발관으로 일했고, 2005년에는 ADD 연구원 출신으로는 최초로 이 연구소 소장이 됐다.
그는 ADD에서 33년간 근무하면서 미사일과 군용 항공기 자체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외국에서 항공기와 무기를 수입하기보다는 자력 생산하는 것을 중시해 한국의 국방과학기술 자립 수준을 한층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는 한서대학교 석좌교수, 한국무기체계안전협회장, 과학기술연우연합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안동만 전 소장 [윤근영 기자 촬영]
다음은 인터뷰 4차 기사 질문-답변
-- 전쟁에서 항공기는 어느 정도 중요한가.
▲ 동력 비행기는 1903년 미국의 라이트형제에 의해 발명됐다. 처음에는 우편배달 등에 사용됐다. 땅덩어리가 큰 미국에서 말을 타고 편지를 배달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1차 세계대전 때 군대가 정찰 목적으로 비행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항공기는 정찰과 전투는 물론 폭격 임무도 맡았다. 최근의 미국-이란 전쟁에서 확인됐듯이 항공 전력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 비행기가 없었을 때는 어떻게 정찰했나.
▲ 사람이 적진에 가까이 가서 파악하다가 18세기부터는 대형 풍선인 벌룬(열기구)을 이용하기도 했다. 당시는 군인들 바로 상공에서 적군의 대형 풍선이 내려다보고 있어도 대책이 없었다. 소총을 쏴도 탄알이 벌룬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아군과 적군 정찰기들이 하늘에서 만나면 공격할 방법이 없어서 서로 인사하고 지나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인가.
▲ 과장된 듯하다. 아군뿐 아니라 적군도 정찰기를 띄우다 보니 하늘에서 만나게 됐고 공중전이 진행됐다. 처음에 비행사들은 권총으로 상대방을 쐈는데, 잘 맞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속도가 느린 정찰기라고 해도 휙 지나가는 데다 쏘는 사람과 표적 모두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다음부터는 기관총을 장착해서 '도그파이팅(dogfighting)'을 벌이곤 했다.
1953년 제작한 '부활호'의 모습 [연합뉴스 자료 사진]
-- 도그파이팅이란 무엇인가.
▲ 개들은 싸울 때 상대방의 꼬리를 물려고 한다. 뒤에서 공격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전투기 싸움도 비슷했다. 적기의 뒤편에 붙으면 비교적 안전한 상태에서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적기의 꼬리 쪽으로 가려면 상대방보다 빨라야 하고, 신속하게 방향을 전환해야 했다. 그래서 비행사의 조종 기술뿐 아니라 비행기 기동 성능이 중요해졌다.
-- 1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는 나무와 천으로 만들었다고 하던데.
▲ 그때는 알루미늄 합금인 듀랄루민이 매우 귀했다. 날개는 나무나 철봉으로 틀을 만들고 천을 덮어씌운 형태였다. 천에다 특수 도료를 칠하면 천막의 천처럼 단단해졌다. 처음에는 날개가 1개였지만 멀지 않아 날개가 2개인 복엽기, 3개인 삼엽기가 나타났다. 비행기를 들어 올리는 양력(揚力)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열강들은 전투기 생산기술 개발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그런 나라들이다. 새 전투기에는 나무와 천 대신에 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알루미늄은 가벼우면서도 강해서 고성능 비행기에 적합했다.
-- 한국은 언제부터 항공기를 만들기 시작했나.
▲ 6.25 전쟁 당시인 1951년 해군의 조경연 중위가 제작한 해취호(海鷲號)와 1953년 공군기술학교의 이원복 소령이 설계한 부활호(復活號)가 있었다. 이후 1972년 ADD와 공군은 미국 파즈마니사의 2인승 PL-2 설계도를 보고 '새매호'라는 연락기(통신 등을 위한 비행기)를 만들었다. 새매호라는 명칭은 박정희 대통령이 붙였다고 한다. 그다음에 ADD는 KT-1 기본훈련기를 개발했는데, 자체 설계도를 갖고 독자적으로 만들어서 양산한 것은 이 비행기가 최초였다. 그 이름은 '웅비(雄飛)'였다.
1991년 12월 12일 처음으로 이륙하는 '웅비' [안동만 전 소장 제공]
-- '웅비' KT-1은 어떻게 기획됐나.
▲ 1985년 말 한국 정부는 미래 신산업 육성을 위해 항공산업육성위원회를 발족했는데, 나는 실무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회는 'F-5E/F 제공호' 사업의 후속으로 한국형 전투기사업(KFP.Korea Fighter Program)을 추진키로 했다. 이때 국내 항공산업도 일본처럼 훈련기에서부터 전투기까지 단계별로 발전시키기로 했다. 이를 위해 기본 훈련기는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고등훈련기는 기술 전수를 통해 만들기로 했다. 그 1단계로 초-중등 훈련기를 합친 기본훈련기를 개발키로 한 것인데, 이것이 KT-1이다. 1980년대 후반 당시 한국 공군은 노후한 기본 훈련기와 중등 훈련기, 관측기를 합해서 100여대를 갖고 있었다. 강위훈 박사(공사 9기.대령)와 나는 이를 국산으로 바꿔보기로 하고 이를 공군에 제안했다.
-- 그 제안이 수락됐나.
▲ 공군 장성들은 "자동차도 이제 겨우 만드는 나라가 어떻게 비행기가 가능하냐?"고 했다. 한국이 비행기를 만들면 자기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미군 비행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ADD 내의 고위 연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미사일을 개발하는 데도 정신이 없는데 무슨 비행기를 개발하느냐고 했다.
-- 그래서 어떻게 했나.
▲ 작은 모형을 만들어서는 그걸 보여주면서 설득했다. 그러자 장성들은 이건 모형에 불과하다고 했다. 나는 실물 비행기를 직접 만들어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당시 안철호 소장(육사 11기, 예비역 소장)에게 "ADD의 기술개발비 100억원만 주면 3년 안에 날아가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안 소장은 이를 승인해줬다. 그런데 연구원들이 참여를 꺼렸다. 기존에 해오던 미사일에 비해 모험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뜻있는 몇몇 연구원들과 입소한지 얼마 안 된 신입 연구원들로 출발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항공기술부장으로서 550마력급 훈련지원 겸 경공격기(KTX-1)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
날아가는 '웅비'를 긴장 상태에서 올려보고 있는 ADD 연구원들과 항공업체 개발자들 [안동만 전 소장 제공]
-- 약속대로 3년 만에 만들어냈나.
▲ 스위스 필라투스 항공사와 크랜필드 대학 교수의 자문을 받아 백지에서 설계를 시작했다. 2년 만에 실물과 똑같은 크기에 동일한 내부 구성을 갖춘 모델을 만들어 보여줬다. 그리고 공군 의견도 수렴했고 미 공군 전문가들의 검토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3년 만인 1991년 후반에 시제기 2대를 완성했다. 그 당시 연구원들은 제작, 조립, 시험을 위해 대전∼창원을 수없이 오가야 했다.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서 제작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도 있었다. 당시 연구원들에게 나는 "우리가 만든 비행기가 세계의 하늘을 날 때, 우리의 후손들에게 우리가 만들었다고 자랑합시다"라며 격려하곤 했다.
-- 인력도 부족했을 텐데.
▲ ADD 내의 개발 인력을 추가로 약간 확보했다. 국내 항공산업체의 설계 능력도 향상시킨다는 차원에서 대한항공, 삼성항공, 대우중공업 등 당시 항공 3사의 연구원들도 개발에 참여토록 했다. 서울대 항공대 교수님들도 자문해주셨다. 그야말로 산학연이 백지상태에서 피땀 흘리며 노력했다.
-- 결국 성공했나.
▲ 1991년 12월 12일 오전 10시 55분 사천 비행장에서 38분간의 초도(첫)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진호 시험비행 조종사가 조종간을 잡았다.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꿈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국산 최초의 지대지 미사일인 '백곰' 이후 13년 만에 느낀 희열이었다. 이듬해 나는 공군 작전훈련처장 이한호 대령(공군 참모총장 역임)과 연구개발 동의서를 작성하고 선행개발에 들어갔다. 동시에 KTX-1에서 실험용(Experimental)이라는 뜻의 X를 지웠다. KT-1이 된 것이다. 그 후 이 비행기는 950마력 엔진으로 바뀌면서 여러 가지 개발 위기도 겪었지만 이를 잘 극복하고 저속 통제기(KA-1)로도 발전했다.
-- '웅비'의 역사적 의미는.
▲ KT-1은 기본 훈련기이지만 엔진을 제외한 모든 분야가 국산이다. 게다가 2001년 인도네시아 수출을 시작으로 4개국에 81대가 수출됐다. 한국이 만년 군용기 도입국에서 수출국으로 전환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KT-1은 우리도 국산 전투기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 성공은 고등훈련/전투기인 T/A-50과 육군의 수리온 헬기를 거쳐 가장 최신 전투기인 KF-21(보라매)로 이어졌다. KT-1은 광복 70주년 국가과학기술 성과 70선에 선정됐다.
KF-21 시제기 최초 비행 성공 사진은 2022년 7월 19일 KF-21 시제기의 비행 모습으로 방위사업청이 공개했다.
-- 전투기 KF-21 '보라매'의 개발은 언제 시작됐나.
▲ 이 전투기 개발을 위한 개념연구(아이디어와 가능성을 연구하는 단계)는 내가 항공유도무기개발본부 본부장이었던 2001년에 시작했다. 이때 공군과 협의해서 스텔스, 비행조종장치, 무장제어, AESA 레이더 등의 핵심기술 연구에 들어갔다. 공군의 송옥환 장군과 ADD의 이대열 박사가 많은 노력을 했다. 보라매는 핵심기술을 해외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목표로 준비했다.
-- 올해부터 양산에 들어갔는데, 어떤 느낌인가.
▲ KF-21은 인도네시아와 공동으로 탐색 개발을 수행한 후 수많은 정책 검토와 논란을 거쳐 2015년에야 체계개발에 들어갔다. 그 결과 2022년에 초도 비행을 마쳤고, 올해 양산 1호기가 군에 인도됐다. 웅비 KTX-1 첫 비행 후 35년 만이다. 우리도 독자적 전투기 설계와 제작 능력을 갖추게 됐으니 정말로 감개무량하다. 꿈이 이뤄진 것이다.
-- KF-21의 성능은 어느 정도인가.
▲ 이 전투기는 4.5세대로, 국산 AESA 레이다를 장착하고 있다. 적기를 100㎞ 이상의 거리에서도 포착하고 추적해서 장거리 공대공 미사일로 요격할 수 있다. KF-21에 장착하는 공대공 미사일은 현재 수입하고 있지만 멀지 않아 국산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전투기 내의 항공전자 컴퓨터는 어떤 미사일을 사용하는 게 좋은지도 빠르게 판단한다. 새 버전은 공대지 공격 능력을 보강하게 되는데, 현재 관련 미사일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미국의 F-35와 비교하면 어떤가.
▲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기 중 하나가 F-35다. KF-21과의 차이점은 최신의 전자전 능력과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도록 하는 스텔스 기능 등일 것이다. 한국의 KF-21도 스텔스와 함께 전자전 기능을 보완하면 5세대에 해당할 정도로 강력한 전투기다.
'엘리펀트 워크' 훈련 중인 F-35A 스텔스 전투기들 사진은 2022년 3월 한국 공군기지에서 진행된 '엘리펀트 워크(Elephant Walk)' 훈련에 참여한 F-35A들로 한국 공군이 미국에서 도입해 운용 중인 전투기들이다
[국방부 제공]
-- 항공기 기술은 엔진뿐 아니라 전반이 어려운 듯한데.
▲ 미사일보다 비행기를 만드는 것이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미사일과 달리 비행기에는 사람이 타고 있어서 안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사일은 한번 쏘면 몇분 내로 사라지지만 항공기는 1만 시간 이상 날아야 한다.
-- 본인은 ADD 근무 시절 군용 항공기는 가능하면 자력 생산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전투기는 대체로 30년 정도 사용하는데 수입할 때의 도입비와 거의 같은 규모의 정비·유지비가 들어간다. 외국에서 전투기를 들여오면 부품 등을 계속 수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대공과 공대지 무장도 갖춰야 하는데, 우리 비행기가 아니면 국산 무기를 탑재할 수가 없다. 또 우리 기술이 없으면 부품이나 미사일 공급자가 요구하는 대로 대금을 줘야 한다. 무기 공급이 아예 중단될 수도 있다. 자주국방을 위해 자체 기술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 항공 기술은 다른 분야로 파급된다고 하던데.
▲ 전투기는 단순한 비행기가 아니고 항행 장비, 광학장비, 디스플레이, 컴퓨터, 통신, 소재, 기계가공, 체계종합 등 수많은 첨단 기술의 집합체다. 이런 기술은 미사일이나 탱크, 구축함 등 다른 무기 발전에도 도움을 준다. 인공위성이나 자동차, 생활가전 등 다른 산업의 기술 발전에도 큰 영향을 준다.
전승절에 곡예 비행하는 북한 전투기들 2022년 7월 27일 북한 전승절 기념행사에서 북한 전투기들이 곡예비행을 하는 모습
[조선중앙TV 화면]
-- 북한의 전투기 제조능력 수준은 한국을 100이라고 할 때 10밖에 안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 북한은 전투기 생산에서 우리를 따라올 수 없다. 전자공업에서 북한은 한국에 비교가 안 되기 때문이다. 북한이 보유 중인 러시아제 전투기의 정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체적인 전투기 생산능력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 향후 한국의 전투기는 어떤 모습인가.
▲ 한국 KF-21의 새 버전은 6세대를 지향한다. 유인 전투기가 수십 대, 수백 대의 무인기를 이끌고 전투를 벌이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서는 위성통신을 포함하는 6세대(6G) 통신이 필요하다. 그래야 유인기-무인기, 무인기-무인기가 연결되기 때문이다. 유무인 합동전력에는 첨단 인공지능(AI)도 동원된다. 유인기들은 군집 무인기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휘를 할 수 있다.
(인터뷰 4차 기사 질문-답변 끝)
2006년 정기 국정감사에 참여한 당시 안동만 ADD소장 [연합뉴스 사진]
<인터뷰 1차 기사 요약>
[삶] "하늘에서 바늘로 바늘 맞추는격…한국 미사일, 세계 톱 수준"(7월13일)
이번 미국-이란 전쟁에서 UAE가 보여준 천궁-Ⅱ의 방어율 94∼96%는 정말로 뛰어난 수준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대공 미사일은 톱 클래스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지대지 미사일을 만드는 '백곰사업'은 1971년 12월 24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박 대통령은 친필 메모를 통해 1단계로 1975년까지 200㎞ 사거리의 국산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백곰 사업은 1978년 9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앞으로 자주국방 수준을 더욱 끌어올리고, 방산 수출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도전했다가 실패해도 용인해주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성과에 대해 제대로 보상해줘야 한다. 현재는 관료주의가 문제다. 국회가 수많은 법을 만들고, 정부가 시행령과 시행규칙 등을 만드는데, 이게 너무 많다.
이러니 실패하면 이런 규정을 근거로 감사원, 방위사업청 감독관실, 군 수사기관, 검찰, 경찰 등의 수사와 감사가 뒤따른다. 실패한 실험은 없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인터뷰 2차 기사 요약>
[삶] "탱크의 무한궤도 파편이 대통령 관람석까지 날아들었다"(7월20일)
1971년 당시 한국이 ADD를 창설하고 기본 무기를 만드는 번개사업을 진행한 것은 안보 환경이 상당히 위급했기 때문이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이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김신조 등 특수부대원 31명을 남한에 침투시킨 '1·21 사태'가 발생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이 있었다. 그다음 해인 1969년 7월 25일에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취지의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당시는 주한 미군 전체가 철수하면 북한의 재침략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1971년 당시 한국은 소총, 기관총 등 기본 병기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ADD 연구원들은 밤낮으로 일해서 한 달 만에 이 병기들을 만들어냈다. 설계 도면이 없어서 미군의 소총, 기관총, 박격포, 대전차 지뢰 등을 해부한 뒤 다시 설계 도면을 그리는 역설계 방식으로 무기를 만들었다. 무기에 들어가는 원자재는 청계천 시장에서 구입하기도 했다. 과거의 이런 노력은 현재의 뛰어난 K-방산의 토대가 됐다.
<인터뷰 3차 기사 요약>
[삶] "韓 벙커버스터 현무-5, 비핵 미사일 중 세계최대 위력 갖춰"(8월3일)
한국의 순항미사일은 아주 정밀해서 1천㎞ 떨어진 건물의 작은 목표물도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을 것이다. 관성항법장치, 위성항법장치, 적외선·레이더 탐색기 등에서 뛰어난 기술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무-5는 지하 수십m를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벙커 버스터다. 정확한 위치 정보를 갖고 있으면 북한의 대부분 지하 벙커를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비핵(非核) 미사일 중에서는 세계 최대의 위력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또다시 전쟁의 아픔을 겪지 않으려면 군사력에서 주변의 적국보다 항상 앞서 있어야 한다. 이는 강한 경제력과 뛰어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우수한 무기체계를 발전시키고, 제대로 된 군사력을 갖추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우수한 국방기술은 튼튼한 안보의 기반이다.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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