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3.0] 이주민 아픔 돌보는 네팔 출신 1호 한국 의사 정제한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8-10 07:26

생물학 공부하다 1992년 한국 유학…의대 졸업후 '3전 4기' 국시 합격


네팔인 노동자 의료상담·봉사 이어와…"다문화 아닌 함께 사는 한국인"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네팔 출신 1호 한국 의사 정제한 씨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네팔 출신 1호 한국 의사 정제한 씨 (울산=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네팔 출신 귀화 한국인 의사 정제한 씨가 자신이 근무하는 울산의 한 재활요양병원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6.8.10 seva@yna.co.kr


(울산=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네팔 출신 1호 한국 의사로 통하는 라제스 천드러 조시(한국명 정제한·55) 씨에게 한국은 처음부터 정착할 나라는 아니었다. 1992년 네팔에서 한국으로 건너올 당시만 해도 학업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3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는 귀화한 한국인 의사로서 울산의 한 재활요양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정씨는 최근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연합뉴스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가 겪어온 변화를 몸으로 느낀 산증인으로서 다문화 사회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그는 1992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대학에서 외국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경찰차만 지나가도 신분 문제를 걱정할 만큼 낯선 존재였다고 회고했다. 지금은 일터와 주거지 등에서 외국인을 쉽게 볼 수 있을 만큼 사회 분위기가 변화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도뿐만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정씨는 "우리는 다 같이 사는 한민족이기에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며 "다문화라는 말로 구분 짓기보다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도 선진국이 된 만큼 더 넓은 마음으로 다문화 사람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며 "좋은 제도 속에서 외국인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해야 행복한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한국행을 처음 꿈꾼 것은 네팔 트리부반대학교 생물학과에서 공부하던 때였다. 당시 한국 의료봉사단이 네팔의 열악한 지역을 찾아 진료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에 가서 의사가 되면 나도 사람을 돕는 의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정성덕 영남대 의대 교수의 도움으로 1992년 한국 유학길에 올라 이듬해 영남대 의대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등록금을 마련할 형편이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지만, 정 교수의 소개로 NGO 지원과 영남대 장학금 등을 받으며 무사히 학업을 마쳤다.


그는 당초 학위를 마친 뒤 귀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네팔의 의료법 변경과 아내의 네팔 적응 문제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해 한국 의사 국가고시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하지만 국시 준비는 또 다른 벽이었다. 세 번째 시험에서는 마킹 실수 탓에 불과 3점 차이로 낙방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이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네팔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지만, 함께 공부하던 후배의 간곡한 설득으로 네 번째 시험에서 '3전 4기' 끝에 합격해 한국 의사 면허증을 받았다.


연합뉴스 인터뷰서 다문화 관련 의견 밝히는 네팔 출신 의사 정제한 씨연합뉴스 인터뷰서 다문화 관련 의견 밝히는 네팔 출신 의사 정제한 씨 (울산=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네팔 출신 귀화 한국인 의사 정제한 씨가 자신이 근무하는 울산의 한 재활요양병원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6.8.10 seva@yna.co.kr


전문의는 가정의학과를 선택했다. 학생 시절부터 네팔인 노동자들의 의료 상담을 해오면서, 한 분야만 알아서는 이들의 다양한 건강 문제에 제대로 도움을 주기 어렵다는 생각에서였다.


내과·외과·신경과 등 여러 진료과를 두루 익혀 환자와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한 그는 2014년 계명대 동산병원에서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취득했다.


의사가 된 뒤 그의 활동 영역은 병원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해마다 네팔 빈민촌으로 의료봉사를 나갔고, 한국에서는 3개 국어(한국어·영어·네팔어) 능력을 살려 네팔인 노동자와 다문화가족을 대상으로 의료 상담을 이어갔다.


노동자들이 병원에서 받은 검사 결과나 처방전, 의뢰서 등을 사진으로 보내면 내용을 설명해주고, 거리가 멀어 직접 만나기 어려우면 전화나 영상통화로 진료받을 병원을 안내했다.


현재는 페이스북 그룹을 통해서도 소통하며 네팔인 커뮤니티 안에서 자연스럽게 의료 상담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상담 내용은 단순한 질병 치료에 그치지 않는다. 낯선 이국땅에서 언어 장벽과 외로움으로 심리적 불안을 겪는 노동자들에게 그는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하다.


정씨는 "간단한 증상임에도 인터넷 정보만 보고 큰 병이 아닐까 불안해하던 사람들이 제 설명을 듣고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할 때 큰 보람을 느낀다"며 "이들의 우울감이나 마음의 병을 덜어주는 것도 제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라고 말했다.


때로는 위급한 환자의 병원비를 위해 동포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으도록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도 하고, 한국 병원 시스템을 잘 몰라 치료받지 못하는 동포들을 위해 전문의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11년 KBS 다문화대상, 2019년 법무부 모범 귀화자상 등을 받았다.


30여년 전 낯선 땅을 밟았던 네팔 유학생의 삶은 이제 한국 다문화 사회의 정착 과정을 오롯이 비추는 거울이 됐다.


정씨는 "한국은 정직하게 살고 열심히 노력하면 대가가 분명히 있는 나라"라며 "앞으로도 제가 가진 의술로 다문화 구성원들이 건강하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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