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일 유애 비
경상남도 진주성 안에 서 있는 병사 겸 목사 이수일 유애 비는 단순한 송덕비의 범주를 넘어선다. 그것은 한 인물의 공적을 기리는 돌이면서 동시에, 전쟁 이후의 사회가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기록이다. 돌은 말이 없지만, 그 침묵 속에는 당시 사람들의 절실한 기억과 선택이 깊게 새겨져 있다.
임진왜란은 이 땅의 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든 사건이었다. 특히 진주성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전투는 단순한 군사 충돌을 넘어, 지역 공동체의 삶 자체를 붕괴시켰다. 성곽은 무너졌고, 집과 논밭은 불탔으며, 사람들은 삶의 기반을 잃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폐허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평화란 총성이 멈추는 순간이 아니라,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긴 시간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이곳은 말해준다.
그 폐허의 시간을 떠맡은 인물이 바로 이수일이다. 그는 병사이자 목사라는 이중의 직책을 맡아 군사적 방어와 행정적 통치를 동시에 책임졌다. 이는 단순한 권한의 확대가 아니라, 시대가 요구한 역할의 변화였다. 전쟁 이후의 사회는 분리된 체계로는 회복될 수 없었고, 군사와 행정이 결합된 통합적 운영이 필요했다. 이수일은 그러한 요구에 응답한 인물이었다.
그의 행정은 통치라기보다 복원에 가까웠다. 그는 허물어진 성을 다시 쌓았고, 흩어진 민심을 모았으며, 피폐해진 삶의 자리를 하나하나 복구해 나갔다. 백성들에게 그는 명령하는 관리가 아니라, 삶을 다시 이어주려 애쓴 책임자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공을 ‘궤애(潰愛)’라는 말로 남겼다. 무너진 것을 다시 보듬고 일으켜 세운 사랑, 그것이 이 비석의 핵심이다.
이 비석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세워진 방식에 있다. 1606년, 그의 임기가 끝난 뒤 진주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이 비를 세웠다. 이는 국가 권력의 명령이 아닌, 공동체의 기억이 만든 결과였다. 권력은 업적을 기록하지만, 기억은 사람을 남긴다. 이수일 유애 비는 바로 그 ‘기억의 선택’이 만들어낸 상징이다.
비문 속에 등장하는 ‘병사 겸 목사’라는 직함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단순한 관직명이 아니라, 조선 중기 지방 통치 체제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전쟁 이후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진주로 옮겨지고, 병마절도사가 진주목사를 겸직하는 제도가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이 비석이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비석은 개인의 공적을 넘어서 제도의 변화를 기록하는 사료적 가치까지 지니고 있다.
또한 이 비석은 당대 지식인들의 협업으로 완성되었다. 비문은 하수일이 짓고, 글씨는 조겸이 썼다. 한 사람의 삶을 기리는 데 문장과 서예, 그리고 시대의 지성이 함께 참여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기념비를 넘어 하나의 문화적 산물로서의 품격을 보여준다.
이수일 유애 비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조용히 질문을 던진다. 전쟁과 같은 극단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무너짐을 경험한다. 그때 우리는 무엇으로 다시 일어서는가. 더 빠른 속도나 더 큰 힘이 아니라, 무너진 것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와 사람을 향한 책임이야말로 회복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이 비석은 말하고 있다.
돌은 시간이 흐를수록 닳아가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병사 겸 목사 이수일 유애 비는 과거의 인물을 기리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살아 있는 역사다. 그래서 이 비석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지금을 비추는 거울이며, 앞으로 묻는 기록이다.
시와 늪 대표 배성근(시인, 수필, 소설, 평론(비평). 칼럼리스트)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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