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 고요가 건네는 가장 오래된 안부, 유현숙 시집 『내일 뭐 해』 출간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6-06-08 08:02

무엇보다 이 시집의 가장 큰 미덕은 따뜻함이다.

그의 고독은 날카롭지 않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는다.

대신 저녁 무렵의 산그늘처럼 천천히 다가온다.

[새책] 고요가 건네는 가장 오래된 안부

유현숙 시집 『내일 뭐 해』 출간

달아실 시선으로 펴낸 유현숙의 신작시집『내일 뭐 해』

달아실 시선으로 펴낸 유현숙의 시집 『내일 뭐 해』는 제목부터 독특하다. 시집의 제목이라기보다 누군가가 무심코 건네는 문자 한 줄 같고, 오래 연락 없던 사람이 문득 보내온 안부 같기도 하다. “내일 뭐 해?”라는 말은 대수롭지 않은 일상어이지만, 이 시집 안에서는 전혀 다른 울림을 갖는다. 그것은 시간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관계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이며,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보내는 구조 신호에 가깝다.


오민석 평론가가 해설에서 지적했듯, 유현숙 시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대’가 있다. 그러나 그 그대는 손에 잡히는 실체가 아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고, 때로는 부재한 존재이며, 때로는 자기 자신이고, 더 나아가 삶이 끝내 닿고자 하는 어떤 이상적 대상이다. 그래서 시인은 늘 길 위에 있다.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가는 사람, 끝없이 기다리는 사람, 기다림 자체를 생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목소리가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한다.


유현숙의 시는 요란하지 않다. 최근 시단의 일부 경향처럼 현란한 이미지의 충돌이나 의도적인 난해함을 앞세우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의 시는 한 발 물러서서 사물과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조급함이 없고, 언어에는 과장이 없다. 마치 오래된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듯, 시인은 삶의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감정들을 천천히 끌어올린다.


특히 이 시집에서 인상적인 것은 ‘고독’의 형상화 방식이다. 많은 시인들이 고독을 절망이나 상실로 표현하지만, 유현숙은 그것을 하나의 숙명적 동반자로 받아들인다. 그의 고독은 날카롭지 않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는다. 대신 저녁 무렵의 산그늘처럼 천천히 다가온다. 독자는 시를 읽으며 고독이 더 이상 견뎌야 할 형벌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결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집 곳곳에 등장하는 자연의 이미지도 주목할 만하다. 숲, 바람, 별, 강물, 나무, 꽃 같은 대상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감정을 대신 말해주는 또 다른 언어다. 유현숙의 자연은 장식이 아니라 공감의 매개다. 시인은 자연을 통해 상실을 말하고, 기다림을 말하며, 끝내는 사랑을 말한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고 나면 풍경이 달라 보인다. 나무 한 그루도, 강물 한 줄기도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품게 된다.


무엇보다 이 시집의 가장 큰 미덕은 따뜻함이다. 문학이 점점 냉소와 해체의 방향으로 기울어가는 시대에 유현숙은 끝까지 사람을 믿는다. 상처 입은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고, 외로운 사람 곁에 의자를 놓아둔다. 그의 시는 누군가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옆에 앉아 조용히 말을 건넨다.


“볕이 참 좋다. 내일 뭐 해?”


어쩌면 이 한마디가 이 시집 전체를 설명하는 문장일 것이다. 그것은 거창한 철학도 아니고 화려한 선언도 아니다. 그러나 오래 혼자 걸어온 사람에게는 그 어떤 위로보다 큰 힘이 된다. 유현숙은 시를 통해 우리에게 다시 사람에게로 가는 길을 묻는다. 그리고 그 길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한다.


『내일 뭐 해』는 빠른 시대를 거슬러 천천히 읽어야 하는 시집이다. 한 번에 읽기보다 곁에 두고 오래 펼쳐보아야 하는 시집이다. 읽을수록 문장보다 침묵이 더 많이 들리고, 의미보다 온기가 더 오래 남는다. 이 시집은 결국 고독에 관한 책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사람에 관한 책이다. 혼자 견디는 법을 말하면서도 끝내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준다.


오늘의 쓸쓸함이 내일의 쓸쓸함에게 보내는 편지.


유현숙의  『내일 뭐 해』는 그 편지를 조용히 받아 읽는 시간이며, 잊고 지냈던 마음의 체온을 다시 확인하게 만드는 귀한 시집이다. 특히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중·장년 독자들에게는 오래전 잃어버린 안부 한 통을 다시 받는 듯한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한영옥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추천사에서 “유현숙 시인은 시와 사람이 나란히 다가오는 사람이다. 그의 시에는 오래 기다린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고요와 감응이 깃들어 있다. 서두르지 않고 삶의 기척에 귀 기울이며, 낯선 듯 신선한 고전적 목소리로 독자를 넉넉한 화음의 세계로 이끈다”고 평했다.


또한 “시집의 시편들은 넉넉한 슬픔에 젖어들게 하면서도, 산그림자 말갛게 강물에 얼비치는 대로 안식을 얻게 한다”며 『내일 뭐 해』를 삶의 빈자리를 따뜻하게 보듬는 시집으로 평가했다.


유현숙 시인

유현숙 시인은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시집으로 『서해와 동침하다』, 『외치의 혀』, 『몹시』, 『내일 뭐 해』를 펴냈다.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2026년 서울문화재단 원로예술지원사업 기금을 받았으며, 2017년 제10회 미네르바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시와 소설을 쓰고 있다.

박상봉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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