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정현종 시집『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오래된 시집 한 권을 다시 펼쳐든다. 가장 힘들고 불우할 때 읽었던 시집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 두 줄짜리 짧은 시 한편으로 각인된 정현종 시인.
그의 첫 시집이자 민음사의 첫 기획 시집 시리즈인 『고통의 축제』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국풍과 가수 이용 바람이 휘몰아칠 무렵에 읽은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이 시집이 문득 눈에 띈다.
『나는 별 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도 도망가고 없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이 시집이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이다.
정현종 시인은 나로 하여금 네루다와 쟝그리니에를 읽게 만들었다.
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녘의 희망들아--나는 그대들을 이따금씩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있다. 티 없는 거울아, 빛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섬』 중 「행운의 섬들」, 쟝 그리니에, 민음사, 김화영 번역
당시 김화영 선생이 번역한 쟝 그리니에의 『섬』 은 베스트셀러로 손꼽히는 책이었다.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한 쟝 그리니에와 정현종 시인은 내 청춘의 기록 속에 선명한 밑줄이 그어져 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면 두 섬이 하나로 오버랩 되어 나타난다.
나는 스물두 살에 첫 아이를 낳았다. 친구들이 대학 캠퍼스에서 공부할 시기에 나는 우유값을 벌러 다닌다고 바빴다. 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포기하고 시립도서관 같은데나 가서 닥치는대로 눈에 띄는 책들을 읽으며 지식에 대한 목마름을 채웠다. 공부에 대해서는 아직도 한이 맺혀있고 늘 책이 고프다.
아이는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했지만 무럭무럭 잘 자랐다. 서른 살이 되자 나는 3년 정도 밖에 생명이 남아 있지않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서른 세살이 되면 내 생명도 끝난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생각할 것들도 너무 많아졌다. 답답하면 바다로 달려갔지만 바다에 떠 있는 섬을 바라보기에도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정현종 시인의 섬이나 쟝 그리니에의 섬처럼 바다에 가서 섬이 되고 싶다.
왼쪽 정현종 시인
어느 해 봄날 우연찮은 자리에서 정현종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 사진 왼쪽에 앉아계신 분이 정현종 시인이다.
그날의 공기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누군가 큰 목소리로 문학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오래 시를 써 온 사람 곁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침묵의 결이 흘렀다. 정현종 시인은 가끔씩 짧게 웃었고,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사람의 말보다 말 사이의 숨소리를 더 오래 듣는 분 같았다.
나는 그날 시에 대해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돌아오는 길 내내 오래된 시집 한 권을 가슴에 넣고 나온 사람처럼 마음이 묵직했다. 어떤 시인은 한 줄의 시보다 존재 자체로 더 긴 여운을 남긴다. 정현종 시인이 내게는 그런 사람이었다.
옻순
붙잡아 둘수도 없고 더디 가자고 종용할 수도 없는 바쁘게 흘러가는 세월 견딜 수 없어 아프고 아픈 것들, 견딜 수 없네. 흐르고 변하는 것들. 옻순 먹는 오월의 한낮. 화끈 달아오르는 견딜 수 없는 가려움. 비라도 흠뻑 내렸으면 좋겠네.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나서 오래된 시집을 펼쳐 읽는다. 서른 세살이 지나고 30년의 세월이 더 흘러도 죽지않고 살고 있지만 여전히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그 시집 마지막 페이지에 이런 두줄짜리 시가 있다.
내가 잃어버린 구름이
하늘에 떠 있구나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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