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비평 칼럼] 닫힌 시대의 상처, 열려야 할 기억-청암 배성근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3-23 09:08

표충사에서 다시 만난 1980.10·27의 시간



오늘 표충사에 다녀왔다. 천황산 자락을 타고 흐르는 바람은 오래된 시간처럼 느리게 내려왔고, 전각들은 그 바람 속에서 한 시대의 기억을 품은 채 고요히 서 있었다. 그 고요 속에서 문득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워진 것이 아니라 잠시 덮여 있었던 시간, 바로 10·27 법난이다. 그날은 기록 속에 머무는 사건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었다.



법당 앞에 서서 기억을 더듬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스며 나왔다. 향 대신 긴장과 두려움이 떠돌았을 공기, 수행 대신 침묵이 강요되었을 순간들. 이곳 역시 그날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에서 벗어나지


그때, 그 사건이 있던 당시 고등학생이었다. 아직 세상의 깊이를 다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지금,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어 다시 이 자리에 서 있다. 세월은 멀어졌지만, 그날의 의미는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서늘한 눈빛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다만 생각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억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가. 시간은 모든 것을 덮는 듯 보이지만, 사실 덮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말해지지 않을 뿐이다.


이때 떠오른 것이 있었다. 10·27 법난 피해자 명예 회복심의위원회. 그 존재는 과거를 들추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잊힌 시간을 다시 현재로 불러내는 최소한의 용기다. 명예 회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보상이 아니라 선언이다. “그날, 당신은 잘못이 없었다”라는 사회의 공식적인 언어다. 그리고 그 한 문장은 국가가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하는 가장 조용하지만도 가장 무거운 고백이다.


표충사의 마당을 걸으며 나는 깨닫는다. 명예 회복은 과거의 정리가 아니라, 현재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라는 것을. 그날의 부당함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지금의 사회가 어떤 방향 위에 서 있는지를 묻게 된다. 10·27 법난이 남긴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향한 물음이다.


권력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 자유는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기억 앞에서 얼마나 정직한가. 우리는 종종 말한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러나 기억되지 않은 과거는 언제든 반복되는 현재가 된다. 그래서 기억은 감정이 아니라 구조가 되어야 한다.

기억은 제도로 남고, 기록으로 이어지며, 일상의 기준으로 작동해야 한다. 10·27 법난 피해자 명예 회복심의위원회의 존재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과거를 위한 기구이면서 동시에 미래를 위한 장치다.



산사는 여전히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는 더 이상 침묵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기억이 있었고, 질문이 있었으며,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표충사를 떠나며 다시 뒤돌아보았다. 표충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시전 천 계곡의 물과, 천황 산의 바람은 변함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닫힌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나 그 시대가 남긴 질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단 하나다.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기억을, 살아 있는 기준으로 만드는 것이다.



시와늪 대표 배성근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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