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자 아버지의 죽음 진실은 무엇일까
마치 양파 껍질 까듯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추락의 원인을 좇으며 가족의 해체를 이야기하는 작품
안개의 해부
― 저스틴 트리에 《추락의 해부》(2023)
장옥관
1
눈 위에 핀 꽃
각혈하듯 머금은 피거품
엎질러진 가족
손 넣어 저어보면
도무지 잡히지 않는
미궁의 꽃
2
너는 알아?
달무리 진 내 눈동자가
네 눈을 닮았단 사실을
너는 알아?
추락하는 순간 네 아빠가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아빠와 내가 원래 하나였어
그래서 아스피린을 나눠 먹은 거야
넌 기억하니?
눈밭에 고요히 엎드려 지켜보던 내 모습을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는 공을 물고
올라가던 내 조용한 발걸음을
알지만 말하지 않지
말할수록 흐릿해지는 빛
‘Snoop’이 내 이름이야
ㅡ장옥관 「안개의 해부」 부분
저스틴 트리에 감독 영화《추락의 해부》포스터장옥관 시인의 「안개의 해부」는 저스틴 트리에 감독 영화 《추락의 해부》에서 출발하지만 단순한 영화의 요약이나 재현에 머물지 않고, 사건과 기억, 그리고 진실의 불확실성을 시적인 언어로 탐색하는 작품이다.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이 시는 ‘안개’를 해부하려 한다. 해부는 본래 분명한 구조를 드러내기 위한 행위지만, 안개는 형태가 없는 존재다. 다시 말해 이 시가 해부하려는 것은 잡히지 않는 것, 즉 사건의 진실과 그것을 둘러싼 기억의 흐릿함이다. 그래서 시는 처음부터 명확한 결론을 제시하기보다, 진실이 어떻게 흐려지고 서로 다른 이야기로 변해가는지를 보여준다.

첫 연에 등장하는 “눈 위에 핀 꽃”, “피거품” 같은 이미지는 추락과 죽음을 상징적으로 환기한다. 눈 위에 번지는 피의 흔적은 사건의 폭력성과 비극성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것은 “미궁의 꽃”으로 표현된다. 사건은 분명히 눈앞에 있지만 그 의미와 원인은 쉽게 붙잡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는 이렇게 물리적인 장면에서 출발해 점차 사건을 둘러싼 관계와 기억의 층으로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들 다니엘이다. 그는 사건의 주변에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정확히 볼 수 없는 존재다. 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 기억과 정체성의 문제를 함께 건드린다. “추락하는 순간 네 아빠가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는 표현은 단순한 사실의 서술이 아니라, 상실 이후 남겨진 사람에게 죽은 이의 기억이 어떻게 내면화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문장이다. 이때 등장하는 안내견 스눕 역시 의미심장한 존재다. 스눕은 사건을 함께 겪은 존재이지만 인간처럼 말을 할 수 없다. 결국 가장 가까운 증인은 침묵하고, 인간은 그 침묵을 대신해 이야기와 해석을 만들어낸다.
시의 중반부에서 화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잘 보인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시 전체의 사유를 압축한 구절이다. 인간은 사건을 직접 보지 못했을 때 오히려 더 많은 해석과 추측을 덧붙인다. 그래서 진실은 하나일지라도 그 주변에는 여러 개의 이야기와 믿음이 생겨난다. “선택은 믿음이야 옳고 그름은 없어”라는 말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진실을 판단하는 과정은 결국 논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각자가 믿고 싶은 방향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추락의 해부》와
비슷한 느낌의 영화로 오토 프레밍어 감독의 《살인의 해부》, 빌리 와일더 감독의 《검찰 측 증인》과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결혼의 풍경》 같은 부부 드라마가 거론된다.
《추락의 해부》 각본은 쥐스틴 트리에 감독과 그의 파트너인 아르튀르 아라리가 공동 집필 했다. 특히 작중 재판에서 증거물로 틀어진 사건 전날의 부부싸움 녹음 파일 대목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관한 의견 차이로 갈등을 빚어 실제로 싸웠다고 한다. 또한 해당 음향 녹음을 딸 때 과정이 무척 힘들었다고 밝혔다. 주연 배우는 해당 씬을 중간에 끊지 않고 하루만에 끝나고 싶어했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자 피로도가 높아서 다음날까지 연장됐다. 이튿날 촬영 때는 필요한 분량을 다 얻었음에도 남편과 아내 역의 두 배우가 연기에 몰입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가서 감독이 이를 놔뒀고, 그렇게 10분 가량의 녹음 파일을 얻어냈다고 한다. 감독은 평소에 음향을 중요시 여기던 터라 해당 녹음이 매우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남편이 튼 음악으로 삽입된 곡은 50cent의 P.I.M.P.이다. 원래 돌리 파튼의 Jolene을 쓰려고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해 모차르트의 곡을 할까 고민하다가 P.I.M.P.가 되었다고 한다.
독일인 작가 산드라(산드라 휠러)는 프랑스의 외딴 산간 지역에서 시각 장애를 가진 아들 다니엘(말로 마치도 그라니)과 남편 사무엘(사무엘 테이스)과 살고 있다. 다니엘은 보더콜리 강아지 스눕과 함께 산책을 나가 집을 비웠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서 아버지가 다락에서 추락해 눈 위에 사망한 아버지를 발견한다.
남편의 추락사로 한순간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유명 작가. 유일한 목격자는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과 아내.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우발적 자살 혹은 의도된 살인일까?
이 영화는 사건의 전말을 해부해 가는 법정 심리물로 2023년 제76회 칸 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미국 아카데미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영화《추락의 해부》법정 장면
남편이자 아버지의 죽음. 진실은 무엇일까. 산드라가 남편을 죽인 살인범이라는 혐의를 받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부분 법정물이 그렇듯, 이렇게 시작하면 산드라는 무고한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법정의 시간들이 이어지면서 진실은 알 수가 없어진다. 마치 양파 껍질을 까듯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또 진실이라는 것이 너무나 가혹해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가족이란 이유 때문이다. 추락의 원인을 좇아가면서 결국 가족의 해부와 해체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프랑스 남자가 죽었고, 독일여자는 영어로 자신을 변호한다. 산드라는 양성애자라는 복잡다단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는 남편의 추락사로 시작하지만, 단순한 죽음의 원인을 추적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유명 작가인 아내 산드라는 한순간에 유력한 용의자가 되고, 유일한 목격자는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과 안내견뿐이다. 사고인지, 자살인지, 타살인지의 갈림길에서 영화는 사건을 섣불리 결론짓지 않고 천천히 해부해 나간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누가 밀었는가’라는 질문이 점점 힘을 잃고, 대신 ‘왜 그렇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자리를 차지한다는 데 있다. 물리적인 추락은 곧 관계의 추락이고,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버티고 있던 신뢰의 붕괴다. 법정 신에서 드러나는 것은 진실이라기보다 각자의 말, 각자의 해석, 각자의 상처다. 진실은 하나일 것 같지만, 말해지는 순간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제목처럼 이 영화는 추락을 해부한다. 추락을 단순한 몰락이나 실패로 규정하지 않고, 그 내부에 무엇이 쌓여 있었는지를 낱낱이 들여다본다. 여성 감독 특유의 섬세한 시선은 인물을 쉽게 단죄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의심하게 만들고, 그 의심마저 무력하게 만든다.
특히 아이의 선택은 인상 깊다. 판단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보다 ‘왜’를 택한다. 그 선택은 진실을 밝히기 위함이라기보다 더 이상의 가족 붕괴를 막기 위한 몸짓에 가깝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명확한 가해자도, 완전한 피해자도 없다. 대신 서로 얽혀 있는 유기적 관계만이 남는다. 보고 난 뒤에도 오래 질문을 남기는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영화다.
영화《추락의 해부》한 장면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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