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250년의 길, 마산 창동의 시간-청계 이상석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3-13 12:15

학문당 서점


창동 거리를 걸으면 문득 사람의 물결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사람의 흐름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흩어지는 풍경, 그래서 우리는 이를 흔히 ‘인파(人波)’라고 부른다. 그 말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오랜 시간 한 도시가 살아온 방식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마산 창동은 창원 속에 자리한 옛 마산의 심장부다. 이름 그대로 예부터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조선 후기 영조 때 세곡을 모으던 조창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물자가 모이고 세금 곡식이 쌓이던 장소였으니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되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한 평의 땅값이 금값에 비견될 만큼 귀하다는 말이 나왔던 것도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일 것이다.


도시는 시간이 흐르며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나 창동은 조금 특별하다. 도시가 현대화되고 주변 풍경이 달라졌어도 골목의 결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250년의 시간을 품은 길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오랜만에 찾은 사람도 낯설지 않게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치 어제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 것처럼 익숙하다.


특히 산업화의 열기가 뜨거웠던 1970년대에서 1990년대 사이, 창동은 그야말로 남해안 상권의 중심이었다. 사람들의 어깨가 부딪히고 골목마다 웃음과 이야기들이 넘쳐났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불어오던 마산 앞바다의 갯바람은 이 거리를 더욱 활기차게 만들었다.


오늘날 창동 거리를 걸으면 또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보도블록 위에는 세계 곳곳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길은 ‘상상길’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진다. 서로 다른 언어와 이름들이 한 공간에 놓여 있는 모습은 창동이 단지 옛 상업의 중심이 아니라 문화와 기억이 교차하는 장소임을 보여준다.


도시는 낮에도 살아 있지만 밤이 되면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비 오는 밤 창동 거리를 걷다 보면 물기 어린 아스팔트 위로 네온빛이 흘러내린다. 행인들의 발걸음 사이로 번지는 불빛을 따라 걷다 보면 누구라도 잠시 자신의 삶을 잊고 도시의 한 장면 속 인물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창동은 단순한 상권이 아니다. 이곳은 수많은 예술가와 문인들이 오가던 문화의 터전이기도 했다. 오래된 벽돌 건물과 담쟁이가 어우러진 풍경은 시간의 깊이를 보여준다. 때로는 새것보다 오래된 것이 더 큰 가치를 지닐 때가 있다. 창동이 바로 그런 공간이다.


이 거리에는 여전히 세월을 버텨온 노포들이 남아 있다. 오래된 간판과 함께 기억 속 이름들이 이어진다. 학문당서점, 황금당, 고려당, 불로식당, 화성갈비 같은 이름들은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한 세대의 기억을 담은 문화적 표지판과도 같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분식집과 서점의 풍경이 아직도 이 골목 어딘가에 남아 있는 듯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55년을 한결같이 자리를 지켜온 ‘복희집’이다. 세월이 수없이 바뀌는 동안에도 그 가게는 묵묵히 창동의 자리를 지키며 여전히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사람들의 발걸음을 받아 온 공간, 그것이야말로 도시의 진짜 역사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가게 하나가 한 거리의 기억을 붙잡고 있는 셈이다.


창동 250년길

도시는 건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이 쌓여야 비로소 하나의 도시가 된다. 그래서 창동을 걷다 보면 개인의 기억과 도시의 역사가 서로 겹쳐진다. 누군가에게는 젊은 날의 첫 만남이 떠오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학창 시절의 설렘이 되살아난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지만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된 골목 하나가 그 기억을 다시 불러낸다. 창동이 여전히 사람들에게 특별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만약 어느 날 문득 젊은 시절의 풍경이 떠오른다면, 잠시 창동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아도 좋겠다. 오래된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잊고 지냈던 시간들이 샘물처럼 다시 떠오를지도 모른다.


250년의 길은 그렇게 오늘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다.



청계 이상석 시인·수필가 (창원·마산)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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