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 광암 김명이 시인 시비앞에서 김명이 시인, 이재한 시인
살아온 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성취보다 아쉬움이 먼저 떠오른다.
인연 앞에서 더 따뜻하지 못했던 순간들, 스스로에게 더 정직하지 못했던 날들. 사람은 누구나 제 나름의 자존으로 산다지만,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삶을 끝까지 지탱하는 힘은 성취가 아니라 겸손이었다는 사실이다.
자고 일어나면 멀쩡하던 지인이 세상과 이별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또 다른 이는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오랫동안 더 많이 갖기 위해 달려왔지만, 시간이 정작 가르쳐 준 것은 그것이 삶의 정답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삶에는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가 있고, 그 가치는 대개 가장 바쁘게 달리던 시절에 스쳐 지나간 것들 안에 있었다.
내가 오래 본받고 싶었던 사람들이 있다.
시를 유려하게 잘 쓰는 이도,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도 아니었다.
화려한 이력 없어도 문학 앞에서 한없이 낮아질 줄 아는 사람들. 20년을 지켜보아도 처음과 다름없는 태도로 문학을 붙들고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공통된 점은 삶이 그들을 함부로 다루었으나 끝내 문학으로 그들의 삶과 한을 녹여 내며 그 자리를 지켰다는 것이다.
김명이 정광일 시인
김명이 시인은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성난 파도에 남편을 잃었다. 그 자리를 대신해 여자 선장으로, 어부 시인으로 살아냈다. 파도가 앗아간 것들을 문학으로 건져 올리며 오늘날까지 문단의 어른으로 많은 존경받고 있다.
정광일 시인은 직장을 다니며 틈틈이 시를 써온 분이다. 시집을 내는 일이 삶의 이유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집념은 허영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는 조용한 다짐에 가까웠다. 지금은 암과 싸우고 있지만, 시를 향한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건강했다.
팔순을 넘긴 김명이 시인이 어느 날 내게 물었다.
"우리,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
나는 오래오래 뵈어야 한다고, 그러니 건강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시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담담히 말했다.
"나는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행사장에 나온다. 이렇게 나오니 자네도 만나고 좋네."
그 말이 남긴 여운이 한동안 가슴에 머물렀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길을 나서는 사람.
그 태도 앞에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우리는 보통 오늘을 내일의 준비로 쓴다.
지금 이 만남보다 다음 일정을 생각하고,
지금 이 사람보다 앞으로의 관계를 계산한다.
그러나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몸에 밴 사람은 덜 서두르고, 더 바라보며, 지금 앞에 마주한 순간 순간이 진심으로 가득하다.
거창한 철학보다 오늘 이 자리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삶 앞에 선 겸손이 아닐까.
계간 시와늪 70집 출판기념회
이런 분들 곁에는 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었다.배성근 회장이 그런 사람이다. 행사장까지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번 마다하지 않고 어른 시인들을 손수 모시러 달려온다. 자신의 투병 중에도 걸음과 마음은 볂함없는 존경 그자체의 약속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자기 자신의 몸보다 공동체와 어른 섬김이 먼저였고, 누군가의 자리를 채워주는 일이 자신의 자리보다 앞섰다.
오늘 시인들이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그 길을 먼저 닦아온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은 혼자 완성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함께 버티는 일이다. 삶도 그렇다. 누군가 묵묵히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오늘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우리는 가장 바쁠 때 잊고 산다.
나는 요즘 그 말을 자주 떠올린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나온다."
지금 이 순간을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오늘 만나는 사람을 소홀히 대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결심이다.
팔순의 시인이 먼 길을 나서며 품는 그 마음이, 어쩌면 우리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삶의 태도일지 모른다.
오늘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다음에 보면 된다고, 언제든 연락하면 된다고 미루어온 사람.
그 사람과의 오늘이, 실은 마지막이 아니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재한 시인(대구) / 시와늪 경북지역본부장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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