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삼키는 시간, 그늘을 길어 올리는 문장
자기 연민을 소비하지 않는 내밀한 절제의 미학
맨발의 시 퍼포먼스 통해 활자의 경계 확장시켜
박은선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손톱 끝에 걸린 세상』(사진=월훈 제공)
박은선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 『손톱 끝에 걸린 세상』을 출간했다. 이번 시집은 단순한 신작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해 온 시 세계가 한층 응축된 결과물이다. 그의 시는 언제나 과잉을 경계해 왔고, 이번 시집에서 그 태도는 더욱 단단해졌다.
『손톱 끝에 걸린 세상』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는 주제를 나열하기보다, 시간의 결을 따라 이동하는 정서의 지도에 가깝다. 1부에서는 사라진 존재들과의 조용한 재회가 이루어진다. 떠난 사람들, 흩어진 시간, 손에 잡히지 않는 기억들이 낮은 음성으로 호출된다. 애도의 언어는 과장되지 않고, 삶의 뒤편을 차분히 더듬는다. 2부는 관계의 재정립을 모색한다. 사랑과 이별, 가까움과 거리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정들을 통해 ‘함께 있음’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관계는 상처이자 동시에 생을 지속하게 하는 힘으로 드러난다. 3부는 내면의 기억과 삶의 근원으로 향한다. 어린 시절의 감각, 지워지지 않는 체온, 반복되는 질문들이 개인의 서사를 넘어 보편적 기억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4부에서는 타인을 통해 자신을 비추고, 자신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려는 성찰이 이어진다. 빛과 그늘, 환희와 침묵이 교차하며 시적 긴장을 만든다. 5부는 이 시집의 정서적 중심이다. 시인의 흔들리는 삶을 42년간 지탱해준 남편이 쓴 「경식의 書」는 헌사를 넘어, 동반자로 함께 견뎌온 시간의 기록이며 사랑에 대한 성찰이다. 오랜 세월 동행의 무게가 사랑의 감정 이상으로 삶을 지탱한 힘으로 재해석된다.
자기 연민을 소비하지 않는 내밀한 절제의 미학
박은선 시의 가장 큰 특징은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통과한 이후의 숨을 놓치지 않는 데 있다. 그의 시는 통증을 통과한 언어이며, 독자와 ‘함께 버티는 시간’을 나누려는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랑을 해부하는 시, 잔재로 남은 감정이 시집에서 사랑은 달콤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입술의 눈물」에서 비와 눈물, 핏물과 빗물이 겹쳐지는 감각은 사랑의 황홀보다 심리적 해부를 한다. 「옆구리에 피어난 꽃」 연작에서는 이별의 잔재가 갈비뼈 사이에서 가시처럼 돋아난다. “갈비뼈 안에 숨겨진 불씨는 핏자국으로 물들고”, 그 이후에도 인간은 “끝없는 고독을 품고 살아간다”는 인식에 이른다. 사랑은 잔혹한 장난으로 남고, 그 흔적은 몸 깊숙이 파고든다.
이 시집은 절망의 기록이 아니다. 오히려 통달에 가깝다. “바다는 날지 않아도 갈 수 있네”(「자화상」)라는 문장은 비상의 욕망에서 수용의 사유로 이동한 자의 언어다. 날개를 찾아 헤매던 시간은 지나고, 이제는 날개 없이도 도달할 수 있음을 아는 나이의 목소리다. 지천명을 지나 이순에 접어든 시인의 언어는 낮지만 깊다. 높이 오르기보다 아래로 파고들어 더 멀리 가는 법을 아는 사람의 음성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암 진단 이후 엄청난 고통의 삶을 겪었음에도 그 경험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절제다. 투병기나 병상일기식 고백을 기대한 독자는 잠시 당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 연민을 소비하지 않겠다는 결심, 고통을 전시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문장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고통은 직접 말해지지 않지만, 문장 사이의 균열을 통해 서서히 번져 나온다. 독자는 그 틈에서 숨죽인 진실을 만난다.
박은선 시인은 무대에서 다른 얼굴을 가진다. 맨발의 시 퍼포먼스 통해 활자의 경계를 확장시킨다.(사진=월훈 제공)
읽는 시에서, 보고 듣는 시로
박은선 시인의 섬세하고 깊은 감성, 통증과 삶의 지속을 주제로 한 내면적 언어는 상처를 드러내되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눌린 숨, 마른 눈물, 말해지지 않은 감정의 결을 따라 천천히 독자의 내면으로 스며든다. 이러한 언어는 종이 위에 머무르지 않고 시 퍼포먼스와 낭독 행사를 통해 활자의 경계를 확장시켜 왔다. 무대에 맨발로 선 박은선 시인은 또 다른 얼굴을 가진다. 낮게 가라앉는 음성, 길게 머무는 호흡, 행간을 건너는 침묵의 시간까지도 하나의 시적 장치가 된다. 그의 낭독은 ‘읽는 행위’가 아니라 ‘함께 체험하는 시간’에 가깝다. 『손톱 끝에 걸린 세상』은 제목에서부터 암시하듯, 손톱 끝에 겨우 걸릴 만큼 위태롭고 섬세한 순간들, 흘러내리기 직전의 감정들, 말로 붙잡기 어려운 통증의 결들이 시인의 시선에 의해 건져 올려진다.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시선은 사물을 스쳐 지나가지 않고, 잠시 붙들어 세워 존재의 온도를 확인한다.
이번 시집의 특징은 여행화가 이해균 작가의 회화와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이 시와 나란히 놓이며 또 하나의 정서적 지층을 이룬다. 시와 그림과 사진은 서로를 설명하지 않고, 대신 서로의 그늘을 비춘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는 종이의 경계를 넘어서는 시적 확장이 눈에 띈다. 시집 한켠에 인쇄된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시인이 직접 낭송한 목소리가 재생된다. 활자에 머물던 언어가 숨을 얻고, 잉크로 눌려 있던 문장이 공기를 타고 진동한다. 독자는 눈으로만 시를 읽지 않는다. 귀로, 피부로, 심장으로 시를 받아들인다. 이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에 잠든 정령’을 깨우려는 시인의 또 다른 방식의 호흡이다. ‘읽는 시집’을 넘어 ‘듣는 시집’으로서의 확장 가능성까지 제시한다는 점에서 박은선 시인의 예술적 실천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박은선 시인은 일상 속 깊은 감수성을 언어로 직조하며, 고통과 회복의 여정을 시 안에 담아내는 문학인이다. 경기도 시흥시에 거주하면서 시인·수필가·시낭송가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지역 방송 프로그램 ‘시흥시야’ 진행자로도 활약 중이다. 또한 「홍매화」 「뗏꾼의 노래」 등의 곡에 가사를 붙인 바 있는 작사가이며, 유튜브 채널 ‘낭독하는 시인’을 운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유튜브 채널 '낭독하는 시인'을 운영하는 박은선 시인은 시흥지역 방송 프로그램 ‘시흥시야’ 진행자로도 활약 중이다. (사진=월훈 제공)
『손톱 끝에 걸린 세상』은 거대한 담론을 말하기 보다 손톱 끝에 겨우 걸릴 만큼 위태롭고 섬세한 감각들, 흘러내리기 직전의 감정들을 붙잡는다. 그러나 그 미세한 떨림은 오히려 우주의 무게를 지닌다. 읽고 난 뒤에도 문장 하나가 갈비뼈 안쪽을 조용히 두드린다. 빛의 환희와 그늘의 무게 중 무엇이 더 강한가. 이 질문은 독자 자신의 삶을 향해 천천히 되돌아온다. 「이방인의 표류」에서 반복되는 “어디서”라는 질문은 공간을 묻는 말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더듬는 언어다. 바람도 구름도 사라진 자리에서, 표류는 이동이 아니라 정착하지 못하는 고독의 상태로 드러난다. 이방인은 타인의 땅에 선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도 환대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고백이다.
그럼에도 박은선 시인은 소속된 문인 단체만 해도 한국현대시인협회 위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한국본부 회원,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원 등 폭넓고 다양하다. 대표 저서로는 『손톱 끝에 걸린 세상』 외에도 『바다의 달을 만나기 전』 『바다만 아는 비밀』 『삶 이외다 홍 이외다 청 이외다』 『갈비뼈에 부는 청초한 바람』 등이 있다.
박은선 시인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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