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1997년 호주로 이민 와서 시드니대학에서 국제정치학 석사와 로스쿨을 마친 후 현재 시드니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문학동인 캥거루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3년 제15회 재외동포문학상 수필 부문에서 「재스민 쌀과 된장찌개」로 가작 입상했으며 2024년 제2회 시드니문학상 수필 부문에서 「발톱」으로 당선됐다.
정동철 수필가
술과 아버지
하필이면 대학에 합격한 가장 기쁜 날, 나는 아버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을까? 모든 책임을 술에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드디어 합격자 발표날이 됐다. 합격 확인 전화 연결이 잘되지 않았다. 빨리 결과를 알고 싶은데 계속 불통이라 애가 탔다. 급한 성격을 가진 아버지는 당장 나에게 서울로 올라가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라고 했다. 나도 급하긴 마찬가지였다. 곧장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영천에서 출발해 3시간 30분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전철과 버스로 서울대 사회대학 현관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미 늦은 오후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벽에 붙은 합격자 명단을 확인했다. 하나씩 살피는데 떡하니 내 이름이 보였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기쁨이 솟구쳤다. 보고 또 봐도 역시 내 이름이었다. 몇 시간 동안 졸였던 마음이 확 풀어졌다. 발뒤꿈치에 용수철이 달려 하늘로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곧장 아버지께 연락했더니 이미 전화로 확인해 알고 계셨다. 신입생 등록 사항을 알아본 뒤 밤차로 집에 가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합격자 명단 주위에는 정치학과 선배들이 신입생들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저녁에 간단한 환영회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과 선배들과 동기를 미리 만나 두면 학교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신림동 대학촌에 있는 허름한 학사 주점에 열댓 명이 모였다. 부대찌개로 저녁을 먹고 두부김치 안주에 술판이 벌어졌다. 선배들이 학교생활을 설명하고 신입생들은 자기소개를 했다. 다들 강한 인상을 주려고 하는 행동이 장기자랑을 방불케 했다. 내 차례가 됐다. 나는 “길냇골에서 온 ‘촌넘’입니다. 잘 부탁합니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길냇골’은 고향 ‘영천(永川)’의 순우리말이다. 선배들은 재미있는 녀석이 들어왔다며 소주를 권했다. 태어나서 처음 마시는 술이었다. 분위기에 취해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그 와중에 고향에 있는 부모님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전화를 하려면 공중전화까지 가야 했다. 그러다가 기억이 희미하더니 어느 순간 불이 꺼지듯 ‘필름’이 끊기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깼다. 어제 처음 만난 선배의 자취방이었다. 옷가지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고 입에서 구정물 냄새가 났다. 다른 신입생 두 명도 옆에서 쓰러져 자고 있었다. 선배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어젯밤 내가 탁자 위에 올라가 춤을 출 정도로 심하게 취했다고 했다.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극도의 긴장이 풀리면서 겁 없이 술을 마시다 사고가 터졌다. 그제야 부모님 생각이 났다. 밤차로 돌아올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떡하지?
선배가 해장으로 끓여준 라면을 먹고 자취방을 나섰다. 골목에 있는 공중전화로 집에 연락했다.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철이 없어도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부모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더냐? 실망과 섭섭함을 담은 말에 잘못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아버지는 상한 마음을 쉽게 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막 행동할 거면 아예 집을 나가라는 매몰찬 말까지 하셨다.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던 다정다감한 아버지의 냉정한 반응에 서운함이 밀려왔다. 아무 일 없이 멀쩡히 돌아왔으면 된 것 아닌가? 무슨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술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하는 반발심이 생겼다.
그날 저녁 말없이 집에서 나왔다. 바로 옆에 있는 초등학교 교정으로 들어가 커다란 소나무 밑에 솔잎을 깔고 누웠다. 이렇게 하룻밤을 자면서 내 불만을 드러내고 싶었다. 누워서 본 하늘에서는 별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도 아플 것이나 나도 서러웠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는데 골목에서 나를 찾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맨정신에 다시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쳐 드린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벌떡 일어나 옷에 붙은 따가운 솔잎을 털어내고 집으로 들어갔다.
30년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처음으로 아픈 골을 만든 술과는 인연이 끊어졌다. 호주로 이민 오면서 함께 마실 친구도 없고 아내의 탄압(?)으로 음주를 이어갈 수 없었다. 그 뒤로 술 때문에 기억이 끊겨 아버지를 까맣게 잊어버렸던 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이민자의 삶을 살았다. 내가 아이 넷을 키우느라 쫓기듯 사는 동안, 아버지는 아들 걱정에 잠 못 이루던 밤처럼 보냈을 것이다. 그렇게 무심했던 아들도 그사이 50대 중반 아버지가 됐다. 어쩌다 다 큰 아들이 연락 없이 들어오는 날이면 그날 밤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아버지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술은 이제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다. 술 때문에 아들에게 서운함을 느꼈던 아버지도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없다.
이원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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