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풍경(29)] 간이역에서 , 권 비오

권오정 문화부장/ 기자

등록 2026-10-19 07:49


간이역에서

쑥대밭 간이역에 무지개 사라져도
인적 끊긴 역사驛舍에 백일홍 외로워라
한 시절
따뜻한 추억
전설로 남았구려

침묵 내린 역사는 거미줄 베고 누워
밤이면 풀벌레 별들 노래 애달파라
화석된
떠난 님 언약
그리움만 쌓였네

/권 비오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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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역에서 길어 올린 
그리움과 시대의 초상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들녘의 곡식은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은 한 해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 분주하다. 그러나 풍요의 계절 한편에는 조용히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다. 사람이 떠난 간이역, 아이들이 떠난 폐교, 사람이 줄어 문을 닫는 마을의 상점과 오래된 삶의 터전들이다.

「간이역에서」은 바로 그 사라짐의 풍경 앞에 서서, 지나간 시간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첫 수의 “간이역에서”은 단순한 폐역의 풍경이 아니다. 한때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며 수많은 사연을 실어 나르던 삶의 공간이다.

이제는 “무지개 사라져도” 인적 끊긴 역사에 “백일홍 외로워라” . 특히 백일홍은 오랜 시간 피고 지는 꽃의 속성 때문에 작품 속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사람은 떠났지만 꽃은 그 자리를 지키며 한 시대의 기억을 증언한다.

“한 시절 따스했던 역 / 전설로 남았구려”라는 종장은 이 작품의 정서를 압축한다.

역은 더 이상 현재의 공간이 아니라 기억 속의 공간이 되었다. ‘따스했던’이라는 표현은 역 자체의 온기라기보다 그곳을 오가던 사람들의 체온과 정을 뜻한다.

작가는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며 결국 사라진 것은 건물이 아니라 그곳에 깃들었던 사람의 역사임을 말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풍경이 더욱 적막해진다.
“침묵 내린 역사는
거미줄 베고 누워”
사람의 발길이 끊긴 역사에 거미줄이 드리워지고, 낮의 침묵은 밤이 되면 풀벌레와 별들의 소리로 바뀐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의 소리가 사라진 자리를 자연의 소리가 채우고 있다는 점이다. “밤이면 풀벌레 / 별들 노래 애달파라”는 구절은 적막하면서도 아름답다. 인간에게 버려진 공간이 자연에게는 다시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뒤에는 지워지지 않는 인간의 그리움이 놓여 있다.
“화석된 떠난 님 언약
그리움만 쌓였네”
‘화석’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눈길을 끈다.

한때 살아 있었던 언약이 이제는 움직이지 않는 기억으로 굳어버렸다는 뜻이다. 떠난 사람도, 그 사람이 남긴 약속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남은 것은 시간 속에 굳어버린 추억과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의 그리움뿐이다.

이 시조가 단순한 향수에 머물지 않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작가는 간이역 하나의 쇠락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공동체의 해체와 생활 시스템의 변화를 바라본다.

우리는 더 편리하고 빠른 세상을 만들었다. 교통은 빨라졌고 통신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래된 간이역이 사라지고, 학교가 폐교되고, 마을의 공동체가 하나둘 해체되었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공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간이역의 폐쇄와 폐교는 단순한 시설 하나의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한 공동체의 기억이 사라지는 일이며,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던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일일 수도 있다.

시인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추억도 있고 아련함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인간은 현재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지나온 시간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통해 오늘을 해석하며, 내일을 살아간다.

추억은 과거에 매달리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려주는 삶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간이역에서」은 폐역을 바라보는 시조가 아니라 사라져가는 우리 삶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조다. 백일홍 한 송이, 거미줄, 풀벌레 소리, 별빛은 모두 쇠락의 풍경 속에서 기억을 지키는 작은 증인들이다.

가을의 들판에서는 곡식이 익어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한편에서는 또 다른 수확이 필요하다. 빠르게 달려온 세월을 잠시 멈추어 바라보고,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을 잃었는지를 헤아리는 일이다.

간이역은 멈추었지만 기억의 열차까지 멈춘 것은 아니다. 폐교의 문은 닫혔지만 그곳에서 뛰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시조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더 편리한 세상을 얻는 대신,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느끼는 작가의 불편한 마음은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사라지는 것은 건물과 시설이지만, 그 속에 담긴 사람의 온기와 추억까지 함께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 「간이역에서」은 바로 그 사실을 조용하고도 깊은 그리움으로 일깨우고 있다.

권오정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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