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앱 '시계'로 설정한 오전 알람 시각이 둘이다. 6시와 6시 15분. 정각 여섯 시면 어김없이 머리맡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듣기 좋아 내려받은 노래이지만 듣기가 싫다. 일어날까 말까 얼마간 망설이면 멜로디가 반복되는 구간에 금방 이른다. 대체 이 노래가 언제 귀에 쏙 꽂혔던 것일까. 짜증이 난다. 어서 끄고 6시 15분에 일어나겠다고 마음먹으면 될 일인데, 그게 잘 안된다. 심적 갈등을 일으켜 어영부영한다. 선택이다. 어정쩡한 선택. 그러다 6시와 6시 15분 사이에 일어날지, 6시 15분에 일어날지, 아니면 이후 어느 때 일어날지 일어나기는 일어난다. 그것도 선택이다. 미룬 선택.
알람 기상으로 시작한 선택은 온종일 이어진다. 볼일을 보고 이를 닦을지, 이 닦고 볼일을 볼지, 양치부터 아니면 씻기부터, 세면만 아니면 샤워까지, 밥 할까 빵 할까 아니면 커피만 한 모금 하고 거를까, 정장을 입을지 말지, 버스를 탈지 지하철을 탈지, 집에서 7시에 나갈지 7시 10분에 나갈지, 5층에 있는 회사 사무실은 계단으로 오를지 엘리베이터로 오를지…. 출근하여 사무실 자리에 앉기까지만 꼽아 보아도 선택해야 할 것이 꽤 많다. 반복되는 일상 행위를 습관화하는 게 왜 중요한지 알겠다. 이 '루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원칙이다. 원칙이 서 있지 않으면 선택은 끊임없이 동요한다.
'취사선택' 표준국어대사전 캡처
저마다 원칙은 다를 것이다. 업무 성과일 수도, 시간 절약일 수도, 비용 절감일 수도, 건강일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선택의 본질이 취사(取捨)라는 점이다. 쓸 것은 쓰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게 취사다. 6시 15분을 택하면 6시를 포함한 나머지 시각은 기상 시각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또 세면만 하면 샤워는 버리는 것이며, 밥을 하면 밥을 하는 것 외의 식사 행위는 안 하는 것이다. 밥도 먹고 빵도 먹고 커피도 마실 수 있거늘 왜 버린다고 하느냐고 반문한다면, 밥도 먹고 빵도 먹고 커피도 마시는 것 역시 그 외의 행위 일체를 선택에서 배제한 것과 같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선택은 그저 둘 이상 여럿 가운데 어떤 것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고른 그것을 빼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이라고 할 때 곧 '취사선택'과 다르지 않다. 같은 말의 다른 해석일 수 있지만 이는 의미 있는 통찰이다. 많은 경우 선택은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 문제와 같아서다. 넷 중 하나를 고르라는 사지선다(四枝選多)는 학창 시절 시험을 치를 때나 하던 선택이다. 인간사의 숱한 도전적 선택은 주관식이다. 사지선다로 치면 답을 하나 고르면 버리는 것이 셋이지만, 인간사의 선택에서는 하나를 고르면 버리는 것이 나머지 모두가 된다. 이 이치를 때로 깜박한다. 얻을 것만 따져 어정쩡한 선택을 하고서 내내 어영부영하다 밀리고 밀린 뒤에야 미룬 선택을 하는 것이다. 아뿔싸, 6시 15분 알람 음악까지 무시하다 늦어 버렸다. 또, 지각이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
※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1. 표준국어대사전
2. 중앙일보 문화 문화일반 [새영화] 비전향 장기수 다룬 '선택' (입력 2003.10.19 16:39 업데이트 2003.10.20 08:47)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41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