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뒷세이아' 완역 김헌 교수 "3천년 전 고전의 힘은 질문하는 힘"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8-26 08:49

22년 걸려 원전 번역…"AI시대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닌 질문"


"호메로스 서사시 최대한 그대로"…'횡격막' 등 원문 생생함 살려


"놀런 감독에 경의…'오디세이' 덕분에 고전에 대한 관심 커져"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을유문화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요즘 한국에서 가장 바쁜 서양 고전학자를 꼽자면 김헌(61)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를 빼놓을 수 없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의 흥행이 고전 읽기 열풍으로 이어지며, 고전학자의 역할도 새삼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오디세이'와 관련한 각종 인터뷰와 방송 출연, 강의 요청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김 교수를 25일 전화로 만났다. 그는 최근 을유문화사에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완역해 펴냈다.


'오뒷세이아'는 1만2천110행으로 이뤄진 말 그대로 대서사시로,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오뒷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 10년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김 교수가 출판사의 제안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번역을 맡은 것은 2004년. 그 후로 '오뒷세이아'를 세상에 내놓기까지 무려 22년이 걸렸다.


대학 강의와 연구 프로젝트 탓에 오롯이 번역에만 매달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던 데다 때론 '이게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작업인가'라는 회의와 절망감도 들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무엇보다 "번역의 원칙을 만들어내기까지 22년이 걸렸다는 생각도 든다"고 그는 번역 과정을 돌아봤다.


처음엔 쉽고 재미있는 번역을 추구했다가도, 기존 번역본과 다를 게 없다면 왜 굳이 책을 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고, 그러다 새로운 원칙을 세우면 지금까지 했던 번역을 처음부터 다시 뜯어고쳐야 하는 일이 수없이 반복됐다.


이런 과정 끝에 그가 세운 가장 큰 원칙은 고대 그리스어로 된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최대한 그대로 살려보자"는 것이었다.


김 교수는 "특히 서사시의 음악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어순과 행수를 최대한 맞춰보려 했다"고 설명했다.


호메로스의 의도에 따라 고유한 운율에 맞춰 단어를 배치하다 보니 김헌판 '오뒷세이아'에서는 일반적 어순을 벗어난 도치된 문장이 자주 보인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잔치 손님들이 들어왔다, 신적인 왕의 집으로./ 그들은 데려왔다, 가축들을, 가져왔다, 남자에게 좋은 포도주를./ 빵을 그들에게 아름다운 면사포 두른 아내들이 보내왔다."(4권 621∼623행)


이를 평이한 문장 구조로 바꾸면 "잔치 손님들이 신적인 왕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가축들을 데려왔고, 남자에게 좋은 포도주를 가져왔다. 아름다운 면사포를 두른 아내들이 그들에게 빵을 보내왔다"라고 옮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평이한 문장으론 애초에 호메로스가 보여주려 한 이미지 구성을 그대로 보여주기 어렵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을유문화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가독성이 떨어지더라도, 이런 도치의 파격은 평서문의 산문성을 벗어나 운문의 음악성을 살리는 데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지고 있던 개념을 그대로 번역해 생생히 전달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김 교수는 다른 판본들에서 지혜, 분별력, 정신, 헤아림 등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프레네스'라는 단어를 본뜻 그대로 '횡격막'이라고 옮겼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했던 '횡격막을 쓴다'라는 표현은 오늘날 지적 활동을 가리킬 때 '머리를 쓴다'는 표현과 유사했고, '오뒷세이아'에서 횡격막의 주요한 기능은 궁리하고, 숙고하며, 계획을 짜는 일이다.


김 교수는 "호메로스 시대 언어의 의미 구조를 너무 현대 독자의 가독성에 맞춰버리면 호메로스의 인간관이나 세계관을 지워버리거나 감추게 된다"며 "낯설고 어색해도 그 언어가 가진 생생한 의미 구조와 세계관과 인간관을 보여주는 게 독자들에 대한 배려"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탄생한 김헌판 '오뒷세이아'는 쌉싸래하지만 분명 곱씹어보게 되는 은근한 맛이 있다.


또 고집스러울 만큼이나 호메로스의 언어를 한땀 한땀 원뜻을 살려 옮긴 그의 번역은 컴퓨터그래픽(CG)을 최대한 배제하고 실사를 고집하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촬영 철학과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김 교수는 놀런의 '오디세이'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오디세이'를 지금까지 두 차례 봤다며 "정말 몰입해서 봤다. 감독에게 경의를 표하는 마음도 생겼다"고 치켜세웠다. 이어 "굳이 아쉬운 점을 찾자니 '비판을 위한 비판' 같다"며 "무엇보다 영화를 통해 서양 고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고전의 가치를 부각해준 것이 고맙다"고 말했다.


오뒷세이아오뒷세이아 [을유문화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놀런의 '오디세이'에 이르기까지 '오뒷세이아'가 3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작품에 영감을 주고 재해석되는 힘은 무엇일까.


김 교수는 고전의 힘이란 '질문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하는 능력입니다. 고전은 답을 주는 것보다 질문하는 역량을 키워줍니다."


김 교수는 "AI 시대가 되면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힘이 더 중요해졌다"며 "고전에는 우리가 잊고 있던 문제들을 일깨워주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놀런 감독 역시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여러 질문을 원작에서 끌어왔고, 나름대로 영화로 답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오뒷세이아' 역시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오뒷세이아'의 번역 작업이 자신에게는 이타카로의 귀환 같았다고 돌아봤다.


"예전에는 고전 번역이란 것이 그냥 대상화됐던 고전을 하나의 또 다른 대상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면 이제는 그 작업 자체가 그냥 인생을 살아가는 어떤 태도와 연결됐어요. 순간순간 제가 이타카를 찾아가고 있는 오뒷세우스로 '빙의' 되는 것 같더라고요. (웃음)"


김 교수는 '오뒷세이아'를 먼저 내놓느라 미뤄뒀던 '일리아스' 번역에도 힘을 쏟고 있다. 내년 말쯤이면 '일리아스' 번역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한국매일뉴스
등록번호인천 아 01909
등록일자2025-07-05
오픈일자2025-07-05
발행일자2026-08-26
발행인최용대
편집인이원희
연락처010)8834-9811
FAX031)781-4315
이메일hangukmaeilnews@naver.com
주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274-3.일심빌딩 302호 031-781-9811.
한국매일뉴스

한국매일뉴스 © 한국매일뉴스 All rights reserved.

한국매일뉴스의 모든 콘텐츠(기사 등)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