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영원의 도시' 로마의 왕자님 마케팅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6-26 07:34

현지 문화계 "로마, 새로운 세상 꿈 못꾸는 박물관에 갇힐 수도"


로마 산타고스티노 성당에 있는 카라바조의 '순례자의 성모'. 이 작품을 감상하려면 동전 조명기에 2유로를 넣어야 한다.로마 산타고스티노 성당에 있는 카라바조의 '순례자의 성모'. 이 작품을 감상하려면 동전 조명기에 2유로를 넣어야 한다. [AP=연합뉴스. 재배포 및 DB 금지]


(로마=연합뉴스) 민경락 특파원 = "개인 저택의 프레스코화들을 감상하신 뒤에는 저희 가문의 왕자와 직접 인사를 나눌 수 있습니다."


당황스러운 답장이었다. 한 귀족 가문의 후손이 로마에서 개인 저택을 개방해 소장 작품을 보여준다고 해서 해본 문의였다. 그랬는데 갑자기 왕자님이 불쑥 손을 내민 것이었다. 어깨 뽕이 부푼 예복 차림의 백마 탄 왕자님이라면 모를까, 스마트폰을 쓰고 넷플릭스를 보는 21세기 왕자는 궁금하지 않았다.


카라바조의 유명 작품 1점을 제외하면 이 저택의 나머지 작품들에 큰 관심은 없었다. 하지만 작품 관람 일정에 추가된 왕자 면담 코스 때문인지 비용은 10명 기준 350유로(약 61만원)나 됐다. 혼자 그 돈을 다 내면 단독 관람을 할 수 있다는 뜻인데 그러면 왕자님도 '단독 면담' 아닌가. 관람 의욕이 순식간에 반토막이 났다. 내향인에게 불가피한 일이었다. 무턱대고 왕자를 소환한 빈티지 마케팅은 그렇게 관심에서 멀어졌다.


유료 관광 시작된 트레비 분수 유료 관광 시작된 트레비 분수 [EPA=연합뉴스. 재배포 및 DB 금지]


로마는 한해 2천만명 이상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 도시지만, 가끔 그들의 마케팅이 투박하고 거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유명 예술작품을 소장한 로마의 유명 성당에서 흔히 보이는 2유로(약 3천500원)짜리 동전 조명기도 그중 하나다.


어렵사리 그림 속으로 빠져들 즈음이면 어김없이 꺼지는 조명. 시대를 초월한 예술에 대한 경외감은 다른 누군가가 제발 좀 빨리 동전을 꺼내줬으면 하는 조바심에 튕겨 나간다. 시간에 쫓긴 관광객이 넣은 땡그랑 하는 동전 소리와 함께 다시 그림 앞이 환해지지만 이미 마음은 조급함으로 얼룩진 뒤다. 불이 또 꺼지기 전에 빨리 그림의 구석구석을 살펴야 할 것 같아서.


로마의 최고 명물 중 하나인 트레비 분수는 올해 2월부터 관람료를 받고 있다. 분수 앞에서 동전을 던져볼 생각이라면 이제 2유로를 내야 한다.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멀찌감치서 분수를 본다면 아직은 공짜다. 로마시는 돈을 낸 관광객을 나머지와 구분해야 했고 결국 청량하게 아름다운 분수 앞 광장은 대기 줄과 바리케이드 출입구로 두동강이 났다.


관람료를 받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뉴욕이라면 "50유로를 받았을 것"이라는 로마의 시의원 말대로 관람료치고 2유로는 지나치게 저렴할 수도 있다.


불편한 건 '그 정도는 푼돈'이라는 듯 예술작품을 서슴없이 막아서는 가림막들의 무성의함이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가 즐비한 디자인·패션 강국 이탈리아라면 2유로짜리 가림막이 아닌 20유로, 200유로도 아깝지 않은 상상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 카라바조가 성당의 동전 조명기와 트레비 분수 앞 바리케이드 출입구를 봤다면 어땠을까. 서양 문명의 발원지라는 로마 한복판에서 정작 위대한 예술가의 후손다운 면모를 찾기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하는 건 기자뿐만이 아닌 듯하다.


트레비 분수 앞에 길게 줄을 선 유료 관광객들트레비 분수 앞에 길게 줄을 선 유료 관광객들 [EPA=연합뉴스. 재배포 및 DB 금지]


지난 달 현지 일간지에 이탈리아의 한 문화계 인사가 로마의 문화적 상상력 부재를 지적하는 쓴소리를 남겼다. 로마는 여전히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겠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 못하는 박물관에 갇히게 될 수 있다"는 걱정이었다.


로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이웃의 한 30대 여성은 스무살이 훌쩍 넘어서야 바티칸 박물관에 처음 갔다고 했다. 지금 가도, 10년 뒤에 가도 다를 것이 없는데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고 했다.


수많은 사람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다시 로마에 올 날을 소망하지만, 그들이 재회한 로마가 얼마나 새롭게 느껴질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로마를 애정하는 외국인으로서 동전 조명기가, 바리케이드가 더 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귀족 마케팅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로마가 세계적인 유물과 함께 상상력으로도 반짝이는 도시라면 좋겠다.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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