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장소⑨] 김춘수와 통영 일몰 명소 달아마을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6-03-22 11:05

놀로 물든 하늘이 어머니 볼을 적십니다

세상은 직선으로 뻗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돌고 있다는 것이 내 인식이다

김춘수 시인

 놀 / 김춘수 (1922~2004)


  어느 날, 70년 전의 어느 여름 저녁입니다. 어머니가

  장독간에 간장을 뜨러 갑니다. 어머니의 치마끝을 붙잡고

  나도 아장아장 따라갑니다. 어머니가 어떤 동작을 하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서쪽 하늘을 바라봅니다. 나도

  무심코 어머니의 시선을 따라 서쪽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 쪽은 온통 놀로 물들어 있습니다. 놀로 물든 하늘이

  어머니 볼을 적십니다. 어머니의 볼도 놀빛으로 불그스름

  물들어갑니다. 나도 또 그런 어머니의 볼을 눈을 똥그랗게

  뜨고 하염없이 들여다봅니다. 그러자 내 눈의 꺼풀을 

  젖히고 예쁜 간장종지를 든 어머니가 샤갈의 그림에서처럼

  내 눈 안으로 선뜻 들어옵니다. 그 뒤로 어머니는 소식이

  묘연합니다.


통영의 일몰 명소 달아마을 전망대에서 본 아름다운 저녁 노을

통영의 일몰 명소인 달아마에서 보는 일몰이 좋고, 조금 위에 있는 달아전망대, 달아공원에서 보는 일몰 또한 매우 아름답다. 


김춘수의 시 「놀」을 읽고 나면, 우리가 바라보는 저녁놀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기억의 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붉은 빛은 유년의 정서를 불러오는 상징이다. 시 속 화자는 어머니의 치마끝을 붙잡고 장독간으로 향하던 어린 날의 저녁을 회상한다. 그 장면은 매우 소박하지만, 놀빛이 어머니의 볼에 번지는 순간 현실은 어느새 회화적 이미지로 전환된다.


특히 “샤갈의 그림에서처럼”이라는 표현은 기억이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상상과 예술을 통해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샤갈의 그림 속 인물들이 공중에 떠 있듯, 시 속 어머니 역시 시간의 중력을 벗어나 화자의 눈 속으로 들어온다. 이는 현실의 어머니가 아니라 기억 속에서 다시 태어난 존재다. 그 뒤로 어머니의 소식이 묘연하다는 마지막 문장은 상실의 정서를 남기지만, 동시에 기억 속 어머니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역설을 남긴다.


샤갈의 그림《비테프스크 마을 위에서》.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두 연인의 삶과 역사가 교차하는 서사시다.

달아마을에서 바라보는 일몰 역시 우리 각자의 기억을 비추는 거울일지 모른다. 붉게 번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누구나 마음속에 오래된 얼굴 하나쯤 떠올리게 된다. 김춘수의 「놀」은 저녁놀이라는 자연 현상을 통해 어머니라는 존재,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사랑의 흔적을 붙잡아 둔다. 놀빛은 하루의 끝을 알리는 색이지만, 이 시에서는 오히려 사라지지 않는 기억의 색으로 남는다. 그래서 통영의 일몰을 바라보는 일은 단순한 풍경 감상이 아니라, 마음속 오래된 장독간을 다시 찾아가는 일과도 닮아 있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보는 저녁놀은 모두 각자의 어머니를 비추는 빛인지도 모른다. 일몰의 순간은 지나가지만 색깔은 오래 마음에 남는다. 김춘수의 시는 그 붉은 빛 속에서 사랑과 상실이 동시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러준다. 놀은 하루의 끝이 아니라, 기억이 시작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김춘수는 1922년 11월 25일 경남 통영읍 서정 61번지(현 경남 통영시 동호동 61)에서 아버지 김영팔, 어머니 허명하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초기에는 릴케의 영향을 받아 삶의 비극적 상황과 존재론적 고독을 탐구했으며, 이 시기의 시집으로는 『구름과 장미』, 『늪』, 『기(旗)』, 『인인(隣人)』, 『꽃의 소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등이 있다.


김춘수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꽃의 소묘』

1960년대 말부터 ‘무의미시’를 주창,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시인의 시론이 잘 드러나 있는 시집으로 『타령조·기타』, 『처용』, 『남천』,『처용이후』, 『처용단장』, 『비에 젖은 달』, 『서서 잠자는 숲』 등이 있다.


1999년 아내 명경숙 여사와 사별한 후 김춘수 시인의 시는 무의미에서 다시 의미로 회귀한다. 『쉰한 편의 비가』에서 죽음 앞에서 망연해지고, 마지막 시집 『달개비꽃』에는 언어의 실험을 내려놓고 문학을 꿈꾸는 한 소년의 독백이 군데군데 스며있다.


김춘수는 결혼 후 마산 처가에서 살면서, 집에 숨어 지냈다. 김춘수는 일제 강점기에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일컫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 찍혀 일제 말기 강제징용에 끌려갈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냈다.


김춘수는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아내와 갓 낳은 딸을 데리고 고향 통영으로 옮겨 갔다. 통영에서 청마 유치환 등을 만나 시의 습작을 다시 시작하고, 자신만의 시를 쓰기 시작한다.


김춘수의 첫 시집 『구름과 장미』에서 다섯 번째 시집인 『꽃의 소묘』로 이어지는 30대의 시작 과정은 릴케(Rainner Marial Rilke, 1875~1926)에로의 경도를 완연히 드러내면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문흥술 「고독한 무의미 시인이 낳은 빛나는 처용」중에서)


경남 통영의 항남동 성광호텔 맞은편 중앙간선도로변에 김춘수 시인의 대표작 ‘꽃’을 새긴 시비

2024년 2월 계명대 시창작 세미나 문학기행 중 들린 통영 김춘수 시비 앞에서(뒷줄 오른쪽 두 번째 장옥관 시인, 앞줄 왼쪽 첫 번째 필자)

경남 통영 출신의 시인 김춘수 선생의 ‘꽃’ 시비가 그의 고향에 세워져 있다. 항남동 성광호텔 맞은편 중앙간선도로변에 김 시인의 대표작인 ‘꽃’을 새긴 시비를 볼 수 있다.


다섯 번째 시집인 『꽃의 소묘』에는 서문이나 발문 없이 ‘우계’ ‘소묘집’ ‘꽃의 소묘’ ‘릴케의 장’의 4부로 나뉘어 23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김춘수가 1984년 시집 출판을 위해 쓴 육필 원고로 1959년 제5시집『꽃의 소묘』에 수록되어 있다.김춘수는 경북대학교에서 20년간 재직하는데, 이 시기 시집으로 『타령조·기타』, 『처용』, 시론집으로 『의미와 무의미』 등을 발표하며, 무의미의 시로 진입한다.


  나는 역사주의자가 아니다.

  역사에 대해서는 늘 절망적, 허무적 입장을 지켜왔다.

  그래서 나는 반동으로 신화주의자가 됐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직선으로 뻗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돌고 있다는 것이 내 인식이다.

  -‘꽃과 여우’ 중에서


경상남도 통영시에 위치한 전혁림미술관의 건물 외벽에 글귀와 함께 인물화가 그려져 있어 독특한 예술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1999년부터 그가 타계한 2004년까지, 그는 거의 평생을 고수해오던 시창작 방식을 전환하여, 사적인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시편을 썼다. 


그는 1999년 4월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던 시기부터 심경의 변화를 시적 형상화 방식에서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이후 그의 시편들에서는 그 변화된 지점을 주제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최라영 『김춘수 시 연구』중에서)


통영 해평5길에 위치한 대여 김춘수 선생 유품전시관은 김춘수 시인의 기념관이 건립될 때까지 임시로 유품을 보관, 전시한 곳이다. 


2008년에 개관된 김춘수 유품전시관은 통영항이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언덕 위에 봉평동 옛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공간으로 ‘꽃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대여 김춘수 시인의 육필 원고와 사진, 생전에 사용하던 가구 및 옷가지 등 약 300여 점의 유품과 원고가 전시되어 있다.


김춘수 시인이 아내에게 쓴 편지와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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