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 벗어던진 오이디푸스…상처 가득한 인간의 처절한 추락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9-25 13:10

국립극단 '안트로폴리스' 5부작 세 번째 연극 '오이디푸스'


독창적 무대 연출·미니멀리즘으로 비극 서사 극대화


국립극단 '오이디푸스' 공연 사진국립극단 '오이디푸스' 공연 사진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조윤희 기자 = 고대 그리스 비극의 상징이자 테베의 구원자로 불리던 오이디푸스가 무대 위에서 자신의 모든 권위를 벗어던졌다.


웅장한 왕관도, 위엄 있는 왕의 모습도 없다. 속옷만 걸친 채 무대에 들어선 그는 누더기에 가까운 차림으로 우스꽝스러운 동작과 과장된 어조, 때로는 동물의 울부짖음까지 내뱉으며 날것 그대로의 몸짓을 내보였다.


가혹한 운명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결함과 상처로 가득 찬 한 인간의 처절한 추락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국립극단의 연극 '오이디푸스'가 지난 24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이번 공연은 문명사회 속에서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국립극단의 5부작 프로젝트 '안트로폴리스'의 세 번째 작품이다. 지난해 1·2편 '프롤로그/디오니소스'와 '라이오스'가 공연됐다.


작품은 소포클레스의 원작을 독일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가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했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관객들에게 친숙한 비극의 내용을 따른다.


신탁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 비극적 운명, 그리고 도시를 덮친 재앙의 원인을 추적하다 결국 자신이 그 비극의 발단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서사는 변함이 없다.


국립극단 '오이디푸스' 공연 사진국립극단 '오이디푸스' 공연 사진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러나 이를 표현하는 시각과 인물의 형상화는 기존 틀을 깨뜨린다.


무대 위 오이디푸스는 고귀하고 위대한 왕이 아니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이자 장애를 갖고 있고 부모 콤플렉스를 품은 인물로 설정된다.


누더기 옷깃을 여미지도 않은 채 무대를 서성이는 오이디푸스는 권력의 존엄함 대신 인간이 가진 취약함을 보여준다. 때로는 희화화된 표정과 이상한 소리로 객석에 신선하고도 생소한 자극을 던지는데, 이는 유머로 소비되기보다 한 인간이 절망의 바닥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강조하는 효과를 낸다.


무대 연출은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며 서사의 묵직함을 더한다.


화려한 장식이나 물리적인 무대 장치를 최소화하고 흰색 배경 위주의 공간을 배치했다.


공허할 정도로 비워진 무대는 그 위에 서 있는 오이디푸스의 고독과 고립감을 극대화한다.


또 다른 독창적 장치는 코러스 역할을 맡은 '비인간 주체들'이다. 말, 개, 염소, 독수리, 심지어 금강석에 이르기까지 무생물과 동물의 형상을 한 존재들이 사건의 목격자이자 증언자로 무대 곳곳에 등장한다.


이들은 오이디푸스에게 닥친 비극과 극적인 상황을 증폭시키며 낯설고 기괴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에 균열을 내는 이 비인간 주체들의 존재는 작품 전체에 신비롭고 몽환적인 감각을 부여한다.


국립극단 '오이디푸스' 공연 사진 국립극단 '오이디푸스' 공연 사진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극의 절정인 이오카스테의 자살 이후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찌르는 대목에서 이러한 연출 방식은 더욱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강렬한 붉은 조명과 붉은 배경 속에서 비인간 주체들과 어우러진 오이디푸스의 모습은 자칫 기괴하고 공포스럽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거부감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인간이 느끼는 극한의 절망과 고통을 고스란히 체감하게 만든다.


파격적인 무대 기법과 낯선 인물 연출 탓에 고전의 정통성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권위의 겉껍데기를 벗겨낸 무대는 진실을 마주한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절망의 바닥에서 직시하게 되는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지 뚜렷하게 보여준다.


공연은 다음 달 18일까지 이어진다.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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