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번째 시집 '물빛인쇄소' 펴내…삶과 죽음·문명 성찰
자연과 교감하며 길어올린 시어…"AI는 방향의 독재자" 비판도
"문학으로 소통하며 지금보다 희망적인 세상 만나고 싶어"
포즈 취하는 함민복 시인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함민복 시인이 지난 30일 서울 마포구 창비 서교빌딩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7.31
mjkang@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말랑말랑한 힘'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과 소외된 삶의 풍경을 노래해온 함민복(64) 시인이 새 시집으로 돌아왔다. 전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이후 무려 13년 만이다.
여섯번째 시집 '물빛인쇄소'(창비 펴냄)를 낸 함민복 시인을 지난 30일 서울 마포구 창비 서교빌딩에서 만났다.
비록 13년 만에 내는 시집이라지만, 문학 팬들에게 함민복은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눈물은 왜 짠가'와 같은 절창으로 독자의 마음 깊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새겨넣었기 때문.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는 원래 다작의 시인은 아니다.
그가 문단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1988년 '성선설'이라는 짧은 시를 통해서였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님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로부터 38년 동안 시집과 동시집, 산문집을 포함해 열 권가량 책을 낸 게 전부다. 하지만 그렇게 띄엄띄엄 낸 그의 책 한 권 한 권은 한국 현대 문학의 중요한 발자취가 됐다.
시인은 '우울씨(氏)의 일일(一日)', '자본주의의 약속', '말랑말랑한 힘' 등의 시집을 통해 가난과 노동, 생명, 자연, 공동체를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내며 독보적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포즈 취하는 함민복 시인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함민복 시인이 지난 30일 서울 마포구 창비 서교빌딩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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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집에서도 시인의 따뜻한 시선은 여전하다.
오랜 시간 벼르고 응축한 시어에서는 한층 깊고 넓어진 사유의 힘이 느껴진다. 특히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이 담긴 시편이 여럿이다.
"베어버리려다 그냥 둔 죽은 나무/ 죽은 나무에는 죽음이 살아 있다/ 이파리도 꽃도 열매도 버리고/ 죽은 나무는 죽음 하나로 서 있다"('죽은 나무' 중)
시인에게 죽은 나무는 단순히 생명의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죽은 나무는 죽음으로써 "잠시 머물러 있음인/ 삶을 비춰"주는 존재이자 거미가 집을 짓고 새가 쉬어 가는, 또 다른 생명을 품는 장소가 된다.
그리하여 시인에게 삶과 죽음은 대립이 아니라 끊임없이 맞물려 순환하는 하나의 운동이 된다.
"삶과 죽음은/ 모래시계, / 끝나지 않은 키스/ 삶 속으로 죽음이, 죽음 속으로 삶이/ 쏟아지게, 수없이 뒤집어보게 설계된/ 죽음과 삶은/ 모래시계"('삶과 죽음은 모래시계, 끝나지 않는 키스' 중)
시인이 이런 인식에 도달한 데는 나이 듦이란 거부할 수 없는 물리적 조건도 있다. 실제 2년 전 심장 시술을 받았다는 시인에게 죽음은 더는 형이상학적 주제가 아니라 생활의 일부가 됐다.
시인은 "지병이 생기니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고, 그러고 나니 되레 죽음에 대한 불안을 벗어나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도 들었다"며 죽음을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시집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핵심 주제는 문명에 대한 성찰이다
시인은 "서로 빛이라 외치는/ 화살표들만 가득"('광화문 광장에서')한 광장에서 저마다 자신의 방향만이 옳다고 외치는 외눈박이의 모습을 목도한다. 그런가 하면 "가자 지구를 향해 날아가는 미사일들"을 보며 그 "정밀한 방향"에 슬픔을 느끼고, "인류가 집적한 어두운 기술의 방향과/ 인류가 저질러온 잔인성의 방향"('방향에 대하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비판적 시선은 인공지능(AI)으로도 향한다.
"AI는 과정을 대행한다, 압축한다, 생략한다/ AI는 모든 화살표를 AI로 통합한다/ 화살표의 무덤 AI시대에 어찌 살아갈 것인가"('장미와 AI' 중)
인터뷰하는 함민복 시인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함민복 시인이 지난 30일 서울 마포구 창비 서교빌딩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6.7.31
mjkang@yna.co.kr
수많은 과정을 압축하고 생략한 끝에 단 하나의 답을 제시하는 AI는 결국 "방향의 독재자"로 군림할 수밖에 없다는 게 시인의 결론이다.
시인은 "하나로 수렴될 수도 없고 단순화할 수도 없는 일들이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다"며 가축이 사료를 받아먹듯 그렇게 AI에 익숙해지다 보면 되레 우리의 삶의 질은 더 낮아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지난한 탐색과 숱한 시행착오 끝에 예상치 못한 길을 만나고 서로 다른 방향이 겹칠 때 새로운 사유가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송현지는 '해설'에서 "함민복이 지키려는 것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상이한 방향이 서로 부딪히고 얽히며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탐색의 시간'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하는 함민복 시인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함민복 시인이 지난 30일 서울 마포구 창비 서교빌딩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6.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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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의 교감, 사람과의 공감도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새 시집에는 시인이 강화도의 자연에서 길어 올린 시어들이 가득하다.
표제작이 된 '물빛인쇄소' 역시 "잔잔 잔잔 제 몸을 구부려/ 반짝 반짝 빛을 출력하는 바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올해로 강화도 살이 30년을 맞은 그는 강화도의 역사와 장소 등을 주제로 한 시집도 낼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그에게 시란 무엇인지 묻자 "시인이란 마음의 길을 내는 사람"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시는 마음의 길을 내는데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은 아니에요. 상대방에게도 이미 있는 것이라야 마음을 이을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마음과 마음이 만나 꽃을 피우는 순간이 공감인 것 같습니다."
그는 또 "누군가와 소통하고 그 소통을 통해서 그래도 지금보다는 희망적인 세상을 만나고 싶은 게 문학을 하는 이유"라며 언어를 통해 생각의 결을 열어주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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