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영화 ㉝] 닫힌 문과 망치 소리 — 영화 《은교》와 「돌 깨는 남자」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6-05-27 13:16

밤늦게 듣는 음악 속으로 그가 걸어 들어온다

감미롭고 황홀한 세계로 나를 인도한다

참으로 남녀의 관계는 불가사의하다

우연한 사고이고 마법이며 화학작용이다

영화《은교》포스터

돌 깨는 남자


박상봉


  나는 열린 책이다 열린 책 속으로 그가 걸어 들어온다 돌 깨는 기계처럼 격렬하게 지축을 울리고 자제력을 마비시키는 힘 맛보고 냄새 맡고 할퀴고 신음하면서 자작나무 그림자 길게 드리워진 달빛 아래서 노동하듯 사랑을 나눈다 여윈 몸 열고 모든 것을 보여준다 엄마와의 갈등, 열여섯 살의 유산流産, 어둠에 대한 공포, 불에 대한 애정…. 그런 것은 잊혀진 상처다. 지금 나의 생활은 완벽하다. 완벽한 가슴, 완벽한 치아, 완벽한 피부를 가진 완벽한 존재


  밤늦게 듣는 음악 속으로 그가 걸어 들어온다 감미롭고 황홀한 세계로 나를 인도한다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탄력,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힘, 쏟아지는 홍수. 손 안에 거머쥐고 마냥 부비고 어루만지며 보고 또 듣는다 화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지축을 울리는 기적소리, 이명耳鳴 속을 헤매다 가슴 치고 목덜미에 한 자락 여운 남기고 가는 사랑


  참으로 남녀의 관계는 불가사의하다 우연한 사고이고 마법이며 화학작용이다


영화《은교》의 한 장면

“나는 열린 책이다.”


이 문장은 고백처럼 시작되지만 실은 가장 닫힌 방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향해 활짝 펼쳐진 몸과 마음을 말하면서도, 그 안에는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어둠과 상처가 숨어 있다. 인간은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를 품은 채 사랑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사랑은 늘 타인의 문을 두드리는 일이지만, 끝내 완전히 들어갈 수 없는 방 앞에 오래 서 있는 일이기도 하다.


정지우 감둑의 영화 《은교》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늙은 시인 이적요는 젊음의 세계 앞에서 끝내 자신의 닫힌 문을 열지 못한다. 그는 은교라는 존재를 통해 잃어버린 시간과 육체, 감각의 불꽃을 다시 만지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존재의 균열을 확인하는 행위에 가깝다. 인간은 타인을 욕망하면서도 동시에 타인 속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영화는 서늘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요즈음 내 머릿속에 가득한 돌 이야기를 좀더 해야겠다. 시도 때도 없이 자르르 자르르 돌들이 서로 몸 부딪치며 굴러다니는 내 심안의 근황을.


내 주위의 모든 사물은 예외없이 저마다의 껍질을 둘러쓰고 들어앉아 있다. 꽃은 꽃의 껍질을, 새는 새의 껍질을, 이웃은 이웃의 껍질을, 책과 연필은 책과 연필의 껍질을 굳게 덮어쓰고 있다. 그것들은 너무 견고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러니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서정주의 「꽃밭의 독백」 속 이 절규는 꽃을 향한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인지 모른다. 문 닫고 모른 체 들어앉아 버린 것은 사물들이 아니라 오히려 내 쪽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그들에게서 도망와서는, 애타게 소리쳐 부르는 그들의 목메인 호소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랑을 하든 자유를 원하든 우리가 들어앉은 방은 닫힌 문이고, 밖으로 나가려는 문은 출구 없는 방이다. 사르트르의 ‘출구 없는 방’에 들어선 사람들은 서로가 제 주변에 있는 다른 존재를 견디지 못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경구는 인간이 스스로를 선택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인간에겐 자신의 생각과 가치, 삶의 방향을 선택할 힘이 있다. 그러나 그 선택에는 책임이 따라붙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 책임이 두려워 한 발 물러선 채 자신이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대신 선택하고 통제하게 만든다. 자기 삶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이기보다 타인에게 통제받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서로를 견디지 못하는 이유 역시 자기 내부의 결핍과 두려움 때문이다. 《은교》 속 인물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영화《은교》의 한 장면돌을 깬다는 것은 어쩌면 세계의 껍질을 깨는 일이 아니라 자기 안의 폐쇄를 깨뜨리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평생 망치를 들고도 끝내 단단한 자기 내부의 암벽 하나 제대로 깨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래서 사랑은 늘 우연한 사고처럼 오고, 마법처럼 스쳐 지나가며, 때로는 화학작용처럼 한 인간의 존재 전체를 흔들어 놓는다.


방을 탈출하는 방법은 어쩌면 단순할지도 모른다. 들어온 문으로 나가면 된다. 그러나 내가 어디로 들어왔는지, 어디가 문인지 모른다. 평생을 들어온 문을 찾아 여기저기 쑤시고 다녔지만 아직도 출구를 발견하지 못했다.


《은교》가 끝난 뒤 오래 남는 것도 결국 그 질문이다. 늙음과 젊음, 욕망과 순수, 사랑과 질투 이전에 우리 안에는 과연 어떤 세계가 살고 있는가.


내가 어떤 세계에 사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 안에 어떤 세계가 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영화《은교》포스터

박상봉 사회부장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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