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물 제521호가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영천 숭렬당 향사당 입규 현판
영천 승렬당 현판
경상북도 영천시의 고요한 마을 안쪽, 나무와 흙의 결이 오랜 시간을 머금은 건물이 있다. 이름은 영천 숭렬당. 국가가 지정한 보물 제521호다. 이곳은 단순한 옛 건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충절과 한 시대의 상처,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려는 공동체의 의지가 겹겹이 쌓인 공간이다.
영천 승렬당 향사당
숭렬당이 기리는 인물은 임진왜란 시기 의병장으로 이름을 남긴 정세아이다. 왜란이 일어나 자그는 관군의 공백을 메우듯 스스로 군을 일으켜 고향 일대를 지켰다. 전쟁은 늘 국가의 이름으로 기록되지만, 실제 전장을 버티는 힘은 지역의 사람들, 곧 ‘의병’에서 나온다. 숭렬당은 그 사실을 조용히 증언한다. 나라가 흔들릴 때, 한 개인의 결단이 어떻게 공동체의 방패가 되는지를 알게 된다.
영천 숭렬당 향사당 입규 현판
건물 자체는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사당 형식을 따른다. 단아한 맞배지붕, 과장되지 않은 공포(栱包), 그리고 마루와 기단이 이루는 절제된 비례가 눈에 들어온다. 화려함보다 절도가 앞서는 구조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숭렬당의 미학은 장식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충절을 기리는 공간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기억을 담는 그릇이 되는 편을 택한다.
이 건물이 ‘보물’로 지정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숭렬당은 단순히 오래된 목조건축이 아니라, 전쟁 이후 지역 사회가 어떻게 기억을 제도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전란이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승패의 기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 그래서 사당을 세우고, 제향을 이어가며, 이름을 불렀다. 건축은 그 반복의 중심이 되었고, 시간은 그 위에 층층이 내려앉았다.
숭렬당 현판
흥미로운 점은, 숭렬당이 ‘과거를 보존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현재를 묻는 장소’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묻게 된다. 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왕에게 향한 일방의 덕목인가, 아니면 공동체를 지키려는 실천의 다른 이름인가. 정세아의 선택은 후자에 가깝다. 그는 중앙의 명령이 아니라, 눈앞의 삶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었다. 숭렬당은 그 선택을 기리는 집이다.
또 하나, 이 공간이 오래 버텨온 이유는 ‘기억의 방식’에 있다. 거대한 기념비가 아니라, 매년 이어지는 제향과 지역의 참여가 이곳을 살아 있게 만든다. 기억은 돌에 새겨질 때보다, 사람이 반복할 때 더 오래 지속된다. 숭렬당은 그 반복의 현장이다. 그래서 이 건물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작동하는 시간의 장치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정보 속에서 과거를 빠르게 소비한다. 그러나 숭렬당 앞에 서면, 속도가 느려진다. 바람이 기둥을 스치고, 나무의 결이 빛을 받아 드러나며, 발걸음이 저절로 가벼워진다. 그 순간 우리는 알게 된다. 역사는 읽는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것이라는 사실을.
숭렬당은 말이 없다. 다만 묻는다. 신은 무엇을 지킬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질문이 남아 있는 한, 이 집은 오래도록 ‘보물’일 것이다.
시와늪 대표 배성근(시인.수필, 소설, 평론(비평), 칼럼리스트)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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