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장소-51] 보름달 속에는 오래된 고향이 산다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6-09-25 12:17

옛 교과서에서 다시 만난 추석, 새 옷과 새 신의 기억

모난 마음 둥글게 다스리는 한가위 보름달

세월은 흘러도 추석이면 어린 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1960년대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교과서에 실렸던 ‘추석’ 이야기“추석이 가까와졌습니다.

벼가 익었읍니다.

밤도 익었읍니다.

감이 익어 갑니다.

즐거운 추석이 옵니다.

어머니가 새 옷을 만드십니다.

우리들의 옷입니다.

추석에 입을 옷입니다.

아버지는 새 신을 사 오셨습니다.

우리들의 신입니다.


사이버교과서박물관 같은 곳을 찾아보면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옛 교과서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추석날 아침, 문득 1960년대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교과서에 실렸던 ‘추석’ 이야기를 찾아본다.


60년도 더 지난 일이라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가까와졌습니다’, ‘익었읍니다’처럼 지금과 다른 맞춤법도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 낡은 문장들이 이상하리만큼 따뜻하다. 벼가 익고 밤이 익고 감이 익으면 추석이 왔다. 어머니는 새 옷을 만들고 아버지는 새 신을 사 오셨다. 몇 줄 되지 않는 문장 속에 그 시절의 가을과 가족과 기다림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요즘은 사이버교과서박물관 같은 곳을 찾아가면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옛 교과서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종이 냄새까지 되살릴 수는 없지만 화면 속 활자를 따라가다 보면 까까머리 아이 하나가 어느새 그 문장 앞에 앉아 있다.


그 시절 추석이 새 옷과 새 신을 기다리는 날이었다면, 나이가 든 뒤의 추석은 떠나간 사람과 멀리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날에 더 가깝다.


둥근 달은 모난 마음을 환하게 다독인다. 한가위란 어쩌면, 서로의 모서리를 조금씩 둥글게 만드는 시간인지도 모른다.추석 달을 보며


문정희


그대 안에는

아무래도 옛날 우리 어머니가

장독대에 떠놓았던 정한수 속의

그 맑은 신이 살고 있나 보다.


지난 여름 모진 홍수와

지난 봄의 온갖 가시덤불 속에서도

솔 향내 푸르게 배인 송편으로

떠올랐구나.


사발마다 가득히 채운 향기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던 말씀


참으로 옥양목같이 희고 맑은

우리들의 살결로 살아났구나.

모든 산맥이 조용히 힘줄을 세우는

오늘은 한가윗날


헤어져 그리운 얼굴들 곁으로

가을처럼 곱게 다가서고 싶다


가혹한 짐승의 소리로

녹슨 양철처럼 구겨 버린

북쪽의 달, 남쪽의 달

이제는 제발

크고 둥근 하나로 띄워 놓고


나의 추석 달은

백동전 같이 눈부신 이마를 번쩍이며

밤 깊도록 그리운 얘기를 나누고 싶다


추석의 달은 단순한 보름달이 아니다. 한가위의 넉넉함을 개인의 가족사에서 민족의 그리움으로 넓혀 놓는다.

문정희 시인의 「추석 달을 보며」를 읽으면 추석의 달은 단순한 보름달이 아니다. 장독대 위 정한수에 비친 어머니의 기도이고, 솔 향 밴 송편이며, 헤어져 있는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둥근 마음이다. 특히 ‘북쪽의 달, 남쪽의 달’을 ‘크고 둥근 하나’로 띄우고 싶다는 소망은 한가위의 넉넉함을 개인의 가족사에서 민족의 그리움으로 넓혀 놓는다.


올 추석 연휴는 예년에 비해 짧은 나흘이다. 그래서인지 해외여행도 일본과 중국, 동남아 등 비교적 가까운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멀리 떠나지 않아도 가을의 깊이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우리 곁에 많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순천이다. 대한민국 제1호 국가정원인 순천만국가정원과 순천만습지는 가을이면 갈대가 갈색 물결을 이루며 장관을 펼친다. 아침의 화포해변에서는 붉게 밝아오는 하늘을, 저녁의 와온해변에서는 바다로 스며드는 노을을 만날 수 있다.


목포에 가면 천연기념물 갓바위가 기다린다. 두 사람이 삿갓을 쓰고 나란히 서 있는 듯한 기묘한 바위 앞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목포의 별미인 세발낙지를 맛보는 것도 좋겠다.


황금빛 조명과 잔잔한 연못에 비치는 반영이 아름다운 경주 야경 명소인 동궁과 월지

경주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역사책이다. 첨성대와 불국사, 석굴암을 지나 저녁 무렵 동궁과 월지에 이르면 옛 신라의 시간이 물 위에 다시 살아난다. 보름달까지 뜬다면 달과 누각이 연못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풍경은 오래 잊히지 않을 것이다. 황리단길의 한옥과 카페, 골목의 먹거리에서는 오래된 도시가 오늘의 젊은 감각과 만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늘 한가위 보름달은 쉽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모양이다. 추석인 25일 전국이 대체로 흐리고 곳곳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다.


그래서였을까. 어젯밤 열 시쯤 동네에서 달을 보자 휴대전화를 꺼내 한껏 당겨 찍었다. 하루 먼저 본 달이었다. 구름에 가릴 줄 알고 미리 얼굴을 내밀어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젯밤 동네에서 휴대폰으로 한껏 당겨 찍은 보름달.

추석을 맞아 고향을 오가는 길은 자연이 차려 놓은 미술관이자 식물원을 지나는 시간이다. 오곡백과 무르익은 들녘이 펼쳐지고, 길가의 나무와 풀들은 저마다 가을빛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마을 어귀에 이르면 잘 익은 감홍시가 먼저 낯을 붉힌다. 코스모스는 바람에 몸을 흔들며 오래간만이라고 말을 건넨다. 생각해 보면 추석 풍경 자체가 한 편의 동화이고, 오래된 삶의 인문학이다.


추석을 ‘회복과 반전의 시간’이라고도 말한다. 잠시 일상을 내려놓고 가족과 고향을 만나면서 지친 마음을 회복하고, 흐트러졌던 생각을 다시 추스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아도 좋다. 연휴가 하루 이틀 짧아도 괜찮다. 보름달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더라도 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60여 년 전 교과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벼가 익었읍니다.

밤도 익었읍니다.

감이 익어 갑니다.

즐거운 추석이 옵니다.”


세월이 흘러 맞춤법도 변하고 추석을 보내는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새 옷과 새 신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도 어느새 늙었다. 그래도 추석이 오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무언가가 익어 간다.


벼가 익고, 감이 익고, 그리움도 익는다.



박상봉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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