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다섯 번째 방
앙칸 찬타팁
깊은 골짜기, 집들, 흘러가는 강
하늘 끝 울타리 너머 흰 구름 떼
산을 덮고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길게 뻗은 산맥
두 팔 벌려 대지를 끌어안는다
마음은 평화를 꿈꾼다
끝없이 불길을 일으키는 고통 속에서도
삶은 꿋꿋이 서서 귀 기울이고
사랑과 희망은 가만히 내리는 비처럼
뜨거운 세상을 식힌다
깊은 골짜기, 집들, 흘러가는 강을 적시며
오래전 마음에 품었던 꿈을 되돌려준다
대지와 하늘은 서로를 품어
내가 태어난 집, 내가 잠들 집이 된다
아주 오래, 오래도록
내가 태어난 집, 내가 잠들 집이 된다
아주 오래, 오래도록……
-빠이, 매홍손 / 불교 사순절 2007
앙칸 찬타팁
1974년 태국 콘깬주 만차키리 출생의 시인으로, 『마음의 다섯 번째 방』의 작가. 이 시집으로 2013년과 2019년 S.E.A. Write Award(동남아시아 작가상)를 받았다.
태국에는 오래전부터 길 위에서 시를 쓰는 전통이 있었다. 니랏(Nirat)이라 불리는 여행시다.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면서 지나온 마을과 강과 사원과 산을 기록하고, 그 풍경에 두고 온 사람과 지나온 삶에 대한 그리움을 겹쳐 놓았다. 여행이 바깥의 장소를 찾아가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던 셈이다.
태국 현대시인 앙칸 찬타팁의 「마음의 다섯 번째 방」도 그런 여행의 마음을 품고 있다. 2007년 태국 북부 매홍손에서 쓴 이 시에는 깊은 골짜기와 집들, 흐르는 강, 흰 구름을 두른 산맥이 나온다. 산은 대지를 껴안고, 그 품속에서 사람은 평화를 꿈꾼다. 시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네 개의 심방과 심실 너머에 보이지 않는 ‘다섯 번째 방’ 하나를 더 만들어 놓는다. 어쩌면 그곳은 사람이 오래 떠돌다가 마침내 돌아가는 마음의 집일 것이다.
치앙마이로 떠나면서 미처 다섯 번째 방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가방을 꾸리고 여권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아직 가보지 않은 도시의 이름을 입속으로 몇 번 불러보았을 뿐이다.
치앙마이.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낯선 도시가 조금 가까워졌다. 여행은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날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순간, 아니 어쩌면 아직 보지 못한 장소의 이름을 처음 마음속에 들여놓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9월 3일 정오, 동대구버스터미널에서 일행을 만났다. 점심을 먹고 김해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자 익숙한 도시가 창밖으로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오후 4시쯤 공항에 도착해 휴대전화 로밍을 확인하고 저녁을 먹었다. 출국 수속을 마친 뒤 오후 6시 55분,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올랐다.
치앙마이는 두 시간의 시차란 시계 위에서는 겨우 숫자 두 칸이지만 몸으로 건너가면 제법 먼 거리다.
창밖이 어두워지고 한참을 날아 오후 10시 10분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한국 시간으로는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두 시간의 시차란 시계 위에서는 겨우 숫자 두 칸이지만 몸으로 건너가면 제법 먼 거리였다.
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 밤인데도 후끈한 공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낯선 나라에 왔다는 사실은 글자보다 먼저 공기의 온도와 냄새로 알게 된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치앙마이는 먼저 자신의 밤공기를 내게 건네주었다.
호텔로 가는 차창 밖으로 처음 보는 불빛들이 흘러갔다. 어디가 구시가지인지, 어느 쪽에 산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일이면 그 길을 걷고, 사원에 들어가고, 시장을 지나고, 이름 모를 나무 아래 잠시 서 있게 될 것이다.
치앙마이 구시가지 남쪽 우아라이 로드(Wua Lai Road)에 있는 호텔.
호텔로 이동해 짐을 풀었다. 치앙마이의 첫날밤은 도시를 제대로 바라볼 틈도 없이 그렇게 지나갔다.
앙칸 찬타팁이 말한 마음의 다섯 번째 방도 어쩌면 그런 곳에 있는지 모른다. 사람이 떠나보지 않고서는 열리지 않는 방.
치앙마이에서의 나흘. 그 문을 찾아 천천히 걸어보는 일정이 시작되었다.
둘째 날 — 산 위의 사원에서 밤시장까지
아침 일찍 눈을 떴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9시 도이수텝으로 향했다. 치앙마이를 내려다보는 산 위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황금빛 불탑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장관이 펼쳐졌다. 왓 프라탓 도이수텝(Wat Phra That Doi Suthep)이다. ‘왓(Wat)’이 사원이라는 뜻이다. 향 냄새가 피어오르고 사람들이 두 손을 모았다. 여행객과 현지인이 한 공간에서 서로 다른 소원을 빌고 있었다.
산 아래의 도시가 멀리 내려다보였다. 여행이란 어쩌면 내가 살던 곳을 잠시 떠나 낯선 곳의 높은 곳에 올라 자신의 자리를 돌아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치앙마이를 내려다보는 산 위의 도이수텝 사원. 계단을 오르자 황금빛 불탑이 눈부시게 빛나는 장관을 펼친다.
점심은 마야몰에서 태국 음식으로 먹고 오후에는 원님만을 둘러보았다. 마야몰이 쇼핑·식사·영화·카페·전망을 한데 모은 젊은 감각의 복합몰에 가까운 치앙마이의 현대적인 얼굴이라면, 원님만은 오래된 벽돌의 표정을 빌려 오늘의 치앙마이를 담아놓은 광장 같았다. 붉은 벽돌 건물과 아치형 회랑, 높은 시계탑, 가운데 열린 광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얼핏 유럽의 작은 광장 같은 느낌도 들었다.
전통적인 사원과 현대적인 상업공간이 한 도시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서로 밀어내지 않고 나란히 살아가는 모습이 치앙마이의 첫인상 가운데 하나였다.
오후 3시에는 타이마사지를 받았다. 한 시간 동안 몸을 맡기고 나니 비행과 이동으로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풀렸다. 치앙마이에서 마사지 한 시간은 우리 돈 1만 5천원 안팎이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두 차례 마사지를 받았다.
저녁은 독일식 뷔페. 태국까지 와서 독일 음식을 먹는 것도 여행이 만들어주는 뜻밖의 조합이었다.
해가 지자 나이트바자로 향했다. 낮의 치앙마이와 밤의 치앙마이는 표정부터 달랐다. 불빛 아래 기념품과 옷가지, 먹을거리가 늘어서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뒤섞였다. 손님을 부르는 상인의 목소리와 음식 냄새, 음악 소리가 밤거리를 채웠다.
치앙마이 나이트바자(Night Bazaar) 부근에 있는 작은 공연형 ‘램쇼바(Ram Show Bar)’ 입구
치앙마이 나이트바자(Night Bazaar) 부근에 있는 작은 공연형 ‘램쇼바(Ram Show Bar)’를 찾아갔다. 램바로 불리는 이곳은 트랜스젠더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화려한 의상과 메이크업을 한 공연자들이 음악에 맞춰 립싱크·댄스·퍼포먼스를 펼쳤다. 여행지의 밤 문화를 경험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여행이다.
트레스젠드의 공연
하루 동안 산 위의 사원에서 시작해 쇼핑몰과 마사지숍, 시장과 밤거리까지 내려왔다. 도이수텝이 치앙마이의 전통·종교적 얼굴이라면, 램바는 밤의 치앙마이가 보여주는 자유롭고 화려한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치앙마이라는 도시의 두 얼굴을 하루 만에 훑어본 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