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작가 솔베이 발레 "글쓰기에서 발견한 것은 전율이었다"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8-17 08:18

소설 '부피의 계산에 대하여'로 로커스상 수상 등 세계적 명성


타임루프 소재로 사랑·기억·존재 의미 탐구한 철학적 사변소설


"이상한 책에 뛰어드는 모든 분께 감사…한강의 '흰' 감동적"


덴마크 소설가 솔베이 발레덴마크 소설가 솔베이 발레 [EPA 연합뉴스.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덴마크 소설가 솔베이 발레(Solvej Balle·64)는 요즘 세계 문학계의 뜨거운 이름 중 하나다.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대표작은 총 일곱 권으로 구상한 연작 소설 '부피의 계산에 대하여'.


2020년 덴마크에서 첫 책이 나왔으며 지난해 시리즈 6권이 출간됐다. 또 영어판이 출간되며 '부피의 계산에 대하여'는 세계적 문학상의 단골 후보가 됐다.


덴마크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에서 세계적 작가로 떠오른 솔베이 발레를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부피의 계산에 대하여'는 인물이 특정 시간대에 갇혀 같은 시간을 반복해서 겪는 타임 루프(Time Loop)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런 설정을 두고 1993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사랑의 블랙홀'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발레에 따르면 그가 타임 루프에 대한 소설을 구상한 것은 영화가 나오기 전인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가는 "아주 오래전 일이라 여러 가지 영감이 있었을 것"이라면서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도리스 레싱, 사무엘 베케트 등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중에서도 깊은 영감을 준 작품으로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꼽았다. 그는 "이 소설이 단 하루만을 다룬다는 발상에 매료됐다"고 설명했다.


'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 주인공이 더블린에서 보낸 단 하루 동안의 일상을 다룬 작품으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구조를 빌린 모더니즘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하지만 작가가 처음 아이디어를 품고 첫 책이 나오기까지는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작가를 괴롭힌 것은 시간이었다. 자그마치 일곱권 분량으로 주인공의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써 내려가는 것은 어쩌면 작가에게 시간과의 싸움이었을 것이다.


작품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을 묻자 발레는 "때로는 그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었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소설이 자신이 기대하는 속도로 완성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되며, 어떤 일에는 그저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덴마크 소설가 솔베이 발레덴마크 소설가 솔베이 발레 [ⓒ Sarah Hartvigsen Juncker. 재판매 및 DB 금지] 


그렇게 탄생한 '부피의 계산에 대하여'는 기이하고 독특한 타임 루프 작품이다.


프랑스 북부 작은 마을에서 남편 토마스와 함께 고서적을 거래하는 타라 셀테르는 매일 11월 18일 아침에 눈을 뜬다. 시간의 선형을 벗어난 타라는 매번 반복되는 하루에서 무엇을 할지 선택할 수는 있지만, 11월 18일을 벗어날 수 없다.


타라는 남편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11월 18일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보지만, 하루가 지나면 남편은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타라는 절망과 고독 속으로 빠져든다.


작가는 사랑과 기억의 관계에 대해 "두 가지가 시간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며 "기억은 과거와 연결돼 있다. 이미 일어난 일, 이제는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일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반면 사랑은 미래를 향해 있다"며 "누군가와 오랜 세월을 함께해왔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의 상당 부분은 그 사람과 함께할 미래를 상상하고 기대하는 일"이라고 그는 부연했다.


고민 끝에 타라는 남편을 떠난다. 소설에서 타라는 반복되는 시간에 갇혀 있지만 공간은 이동할 수 있다. 타라는 회색빛의 북프랑스를 벗어나 하루하루 유럽 전역을 돌며 스스로 계절을 만들어 시간의 감각을 회복하려 한다.


이야기가 흐를수록 소설은 사랑 이야기에서 존재와 고독에 관한 철학적 탐구로 바뀐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는 하루를 다시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반복은 권태가 아니라 관찰이 되고, 관찰을 통해 익숙함은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인간 존재와 시간, 기억, 소비와 자연에 이르기까지 놀라울 만큼 넓은 세계를 하루라는 시간적 범위 안에서 펼쳐 보인다.


타라는 하루의 작동 방식을 조사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매일매일을 기록한다. 그러면서 타라는 "문장 속에 치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부피의 계산에 대하여부피의 계산에 대하여 [은행나무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작가에게 글쓰기란 무엇인지도 물었다.


"제 삶에서 글쓰기는 그저 10대 때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남몰래 하던 일이었죠. 글쓰기에서 제가 발견한 것은 치유라기보다는 전율이었습니다. 문장에서 비롯되는 전율이었죠."


'부피의 계산에 대하여' 1권은 2024년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2025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작가는 3권으로 2025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소설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2026년 로커스상 번역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발레는 이 과정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경험도 들려줬다.


"대부분 작가는 책을 완성한 뒤 문학상 후보 지명을 받지만,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을 때 저는 6권을 한창 쓰고 있었습니다".


이어 그는 "최종 후보에 오르면 인터뷰와 낭독회, 여러 행사에 참여하도록 초대받는다. 대단한 경험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작품 자체에서 주의를 돌려놓는 면도 있다. 책을 쓰고 있을 때 정말 원하는 것은 그저 계속 페이지에 집중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작가는 현재 시리즈 마지막 권인 7권을 집필 중이다.


1권과 2권은 올해 6월 은행나무출판사를 통해 국내에 번역 소개됐다. 번역은 스칸디나비아 문학 전문가인 손화수 번역가가 맡았다.


한국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작가는 "이렇게 이상한 책에 뛰어들고 싶어 하는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며 "그저 너무 이상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재치 있게 답했다.


그는 또 자신이 마지막으로 읽은 한국 작가의 작품이 한강의 소설 '흰'이라고 했다.


발레는 영국 작곡가 로라 볼러가 '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음악을 듣고서 소설을 접하게 됐다며 "아름다운 작품이고, 음악 또한 매우 아름답다. 둘 다 아주 감동적이고 선명하다"고 찬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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