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들이 쓴 독립유공자·후손 이야기…'필추' 정신 배웠죠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8-15 08:39

파주 한민고등학교 JROTC 대원들이 기록한 '나라를 지키던 그날의 마음'


(의정부=연합뉴스) 최재훈 기자 = "1차 인터뷰를 끝내고 우리 진짜 열심히 해보자, 아니 열심히 해야 할 것 같다고 서로 다짐을 했어요."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임시정부 중책 김상덕, 광복군 3지대장 김학규, 여성 광복군 오광심, 대한제국 외교관 출신 독립운동가 이범진.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으나 독립운동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다.


나라를 지키던 그날의 마음나라를 지키던 그날의 마음 [촬영 임병식 기자]


이들과 후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나라를 지키던 그날의 마음'이 출간됐다. 어른들이 해야 했을 일을 한 저자들은 입시로 한창 바쁜 고등학생들이다.


광복절을 앞둔 지난 12일 저자인 한민고등학교 동아리 JROTC 단원들을 만났다.


233쪽 분량의 이 책을 보며 먼저 흥미롭고 잘 읽혀 놀랐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거나 후손의 말을 기계적으로 옮기는 방식을 넘어 독립유공자와 그의 후손, 그를 인터뷰하는 학생들의 시점이 오가며 독자의 몰입을 끌어낸다.


다음은 권기옥 여사의 아들 권현씨 인터뷰 내용 일부다.


"그렇게 6·25 전쟁 이후에는 지사께서 어떻게 사셨을까요? 삶이 너무 고달프셨을 것 같아요" / "그러셨으면 좋았겠는데 어머님이 어디 그런 분이시던가요?"


우리의 기대와 달리 권기옥 지사는 쉼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처럼 인터뷰 내용 사이에 인터뷰이의 시각과 글쓴이의 생각을 녹여 가독성을 높였다.


편찬에 참여한 한민고 JROTC 학생들편찬에 참여한 한민고 JROTC 학생들 (파주=연합뉴스) 임병식 기자 = 나라를 지키던 그날의 마음 편찬에 참여한 파주 한민고등학교 JROTC 학생들이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저술 작업에는 지난해 기준 20명이 함께했는데 이날 인터뷰에는 본격적인 저술 작업을 했던 지난해 기준 1학년 학생 11명만 참여했다. 2026.8.15

※전체 저술 참여 학생 명단: 김건우, 김수빈, 김예준, 김태원, 노유진, 맹희민, 박혜원, 윤서진, 강지은, 박보민, 성은지, 안윤서, 이유민, 이윤서, 장현우, 정승우, 정영지, 조민서, 태나경, 홍나영(사진 순서와 관계없음)


학생들은 "너무 딱딱한 설명서보다는 가독성 좋은 소설을 읽는 느낌을 주고 싶어서 선생님, 친구들과 상의해 그런 형태로 쓰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 특위를 이끌던 김상덕 지사의 집을 찾았을 때의 무서운 분위기, 광복군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며 200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암기해 동지에게 전달했던 오광심 지사의 일화, 선친이 매장된 중국 내 땅의 흙을 가져오기 위해 분투한 김상덕 지사의 아들 김정육씨의 사연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이어져 책의 내용 자체도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듯 흥미진진했다.


기록자로서 학생들의 진지함과 성의도 가득했다.


기자가 취재를 준비하며 이 책을 펼치기 직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들이 쓴 책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입시 압박 속에 사는 고등학생이 진학과 직접 연관 없는 활동까지 하면 동력이 떨어지고 진정성의 한계가 글에 드러났을 것이라는 선입견이다.


그러나 인쇄된 글과 취재에 임하는 저자 학생들의 말과 표정에서는 비장하다고까지 할 만큼 진정성이 있었다.


오광심 지사오광심 지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학생들은 집필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질문을 설정하는 것이었다는 데 모두 동의했다.


'질문이 사건을 너무 단순화, 파편화하는 것 아닌가?' 또는 '힘들게 살아온 유공자나 자손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닌가?' 등을 고민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썼다 지웠다고 한다.


학생들은 팀을 나눠 유공자 자손 1명당 3회 이상 방문해 이야기를 들었다.


녹음된 이야기를 혼자 또는 함께 들으며 혹시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는지 검증했다.


이범진 열사 증손자를 인터뷰한 학생은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는데 기록이 정말 중요하다는 점을 배웠다"며 "내가 쓴 기록도 공신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또 다른 형태의 기록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취재가 끝난 뒤 교실로 돌아가던 한 학생이 발걸음을 돌려 기자에게 향했다. 독립유공자 관련 이야기 중 오류가 있어 정정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심각한 오류가 아니었는데도 혹시나 잘못된 내용이 기사로 기록될까 걱정하는 눈빛이 진지해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걱정 마라"고 다독였다.


의정부 정보 도서관에 기증된 도서의정부 정보 도서관에 기증된 도서 [경기북부보훈지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학생들은 취재 내내 필추(筆誅)의 정신을 강조했다.


필추는 '붓으로 벌한다'는 의미로,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가 해체된 이후 김상덕 지사의 자손 김정육씨가 친일 척결과 관련해 언론과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학생들은 "과거의 잘못을 글로 기록하며 꾸짖는다는 의미를 넘어 진실을 잊지 않기 위해 묻고 기록하는 노력의 가치를 담고 있는 말"이라며 "이번 인터뷰를 통해 필추의 정신을 배운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설명했다.


입시의 중압감 속에 부족한 시간을 짜내야 했지만 학생들은 "후배들에게 자신 있게 추천하고 싶은 활동"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 학생은 "삶 자체가 공부에 갇힌 느낌이었는데 자신의 한계를 깨고 세상으로 뛰쳐나온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니 오히려 내 삶이 위로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학규 지사의 후손 김일진씨와 학생들김학규 지사의 후손 김일진씨와 학생들 [경기북부 보훈지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인터뷰 인물 선정과 자료 제공에 경기북부보훈지청이 함께 했다. 제공된 자료는 보훈지청이 공훈전자사료관과 독립유공자 공적 정보를 토대로 했다.


경복대 영상미디어텐츠과에서 애국지사와 자손들의 이미지를 AI로 합성해 의미를 더했다.


'나라를 지키던 그날의 마음'은 의정부 정보 도서관 등 도서관에 비치됐으며 교보문고에서 전자책으로도 무료로 볼 수 있다.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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