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보지 못할 아름다운 여행
잊기 위해 걷고 그리워서 또 걷습니다
사랑은 완성이 아니라 가슴에 품고 떠나는 고독의 미학
배창호 감독 독립영화《길》포스터새로운 길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이 시는 윤동주 시인이 1938년, 스무 살 청년의 나이에 쓴 시로, 매일같이 걸어가지만 결코 낡지 않는 ‘새로운 길’에 대한 사색을 담고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며 살고자 했던 윤동주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줄 아는 섬세한 마음을 지닌 시인이었다. 그에게 시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 하는 일이었고, 그래서 그의 길은 언제나 고요하면서도 고단한 길이었다.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이라고 말했던 그 다짐처럼, 시의 길은 늘 외롭고 험한 길이기도 하다.
배창호 감독 독립영화《길》의 스틸컷어쩌면 영화의 길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또 하나의 길을 내는 일이다. 그 길은 때로 관객의 환호 속에서 환히 열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무도 걷지 않는 채 조용히 사라지기도 한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도 그런 길 하나다. 바로 배창호 감독이 만든 독립영화 《길》이다. 이 영화는 한때 충무로 개봉관에 걸렸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간판을 내렸다. 작품성과는 별개로 흥행에는 실패했고, 그렇게 또 하나의 영화가 조용히 스크린에서 내려왔다.
오늘은 그 영화가 왜 관객에게 닿지 못했는지, 그리고 충무로에서 간판을 내려야 했던 사연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배창호의 세 번째 독립영화 《길》은 7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우리나라 곳곳의 아름다운 길과 풍경을 영상에 담은 로드무비다. 급격한 산업화를 거쳐 오는 동안 잊어졌던 개발 년대의 풍속과 삶의 편린들을 끄집어 내 관객들의 가슴을 울린다.
또 전라도, 강원도, 경상도 곳곳의 정취와 아름다운 영상이 관객들의 눈길을 끈다. 경북 성주의 옛날 장터와 왜관의 낙산이발소 등이 배경으로 나와 관객들에게 더욱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선다.
영화의 촬영장소를 살펴보면 강원도 임계 안도전의 시골 여인숙, 강원도 삼척 환선굴의 너와집, 강원도 태백의 시골버스와 차부, 강원도 도계 장터와 강원도 대관령의 겨울 산 길, 경북 안동 낙동강과 길, 전남 함평 5일장, 전남 섬진강과 구례 운조루, 지리산 산동 산수유 마을과 만경평야, 변산반도, 곰소 염전, 임실 등 우리나라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과 구석구석 사라져가는 풍물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 영화사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을 터이다. 또 한 번 나의 적극적인 홍보 마케팅에 힘입어 이 영화는 ‘제14회 필라델피아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제4회 광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는 등 예술성과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국내외 영화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배창호 감독 독립영화《길》의 스틸컷
그러나 영화의 뛰어난 예술성과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개봉관도 못 잡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과 마찬가지로 흥행에 별 재미를 못보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영화는 벌써부터 폭력과 섹스가 판을 치고 있기에 예술영화는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구미에 배창호 감독 초청 시사회 행사를 가지고 오마이뉴스를 필두로 여러 신문에 보도를 하였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오마이뉴스를 볼 것이라고 판단하여 고도의 전략적인 맞춤형 마케팅 기법을 구사한 것이다.
내 생각은 정확하게 적중하여 열흘 뒤 의도한 대로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2007년 1월 1일 서울 소공동의 롯데시네마에서 배창호 감독의 영화 ‘길’을 관람했다.
그런데 모 신문사 기자가 노무현 대통령이 영화를 본 것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기사를 쓰는 바람에 대통령의 임기 만료를 앞두고 일종의 권력누수 현상인 레임 덕(Lame Duck)을 겪고 있던 노무현 대통령은 적지 않은 데미지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천신만고 끝에 서울 충무로에 개봉관을 잡아 상영 중이던 이 영화도 노무현 대통령이 영화를 본 그날 이후 관객의 발길이 끊겨 며칠을 더 버티지 못하고 간판을 내려야 했다.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몇 개월 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경주에서 맞닥뜨리는 인연이 이어졌다. 그 무렵 한·미 정상회담이 경주현대호텔에서 열려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한 것이다.
그날 나는 구미의 기업인들과 더불어 같은 호텔에서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었다. 호텔 로비에 나와 보니 청와대 경호원들을 비롯해 경찰과 각급 유관기관장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하늘이 주신 기회’다 싶어 얼른 가방에서 내 첫 시집『카페 물땡땡』한권을 꺼내 들고 경호원에게 다가가 “대통령님 몇 층에 계시냐?”고 물어보았는데 의외로 “방금 행사 마치고 7층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라고 순순히 응답해주었다.
나는 경호원들의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7층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가슴이 뛰었다. 내 시집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해주고 그가 어느 한 페이지라도 읽었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다면 그야말로 시집은 대박을 치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번 기회에 나는 스스로 내 시집에 대한 ‘대통령 마케팅’을 다시 한 번 구사해서 서정윤의 시집 『홀로서기』 보다 더 많이 팔릴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들떠 있었다.
박근혜가 2012년 대선에서 당선한 직후 들고 나와 화제가 됐던 이른바 ‘박근혜 백’이 1000만원이 넘는 고가임에도 불티나게 팔린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배창호 감독 독립영화《길》의 스틸컷
그만큼 ‘대통령 마케팅’은 즉시적이고도 굉장히 폭발적인 효과가 나타난다. 그런데 아뿔사 나는 과대망상증 아니면 너무 순진한 생각을 하였던 것이었다. 경호원이 노무현 대통령의 위치를 순순히 알려준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엘레베이터는 7층에서 문이 열리지 않도록 조치되어 있었다. 나는 헛걸음질 치고 내려와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무현 대통령이 내려올 때까지『카페 물땡땡』을 가슴에 소중하게 품고 노심초사 기다렸다.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경주 시장과 함께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가깝게 다가서며 인사를 했더니 김 도지사는 반갑게 내 손을 맞잡아주었다. 나는 잘됐다 싶어 김관용 도지사 옆에 바짝 붙어섰다. 그때 장관들이 대 여섯 명 우루루 쏟아져내려왔다. 그들 중에 추병직 건설교통부 장관이 또 눈에 띄었다. 나는 너무 반가워 그를 붙들고 인사했다. 추병직 장관은 멀뚱해하지 않고 내 가슴에 찬 패찰을 훑어보더니 “박광석 단장님 요즘 잘 계시냐?”고 묻고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기도 하였다.
내가 한번의 일면식도 없는 추병직 장관에게 다가가 반갑게 인사하고 허리를 굽신댄 이유는 경기도 시흥 연성지구에 살 때 추병직 장관이 집값을 1억원 이상 올려준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추병직 건설교통부 장관이 집값 불안을 해소하고자 인천 검단 지역에 분당 규모의 신도시를 건설하겠다고 ‘깜짝 발표’를 한 것이 도리어 집값 상승을 부추기는 역효과로 나타났다. ‘추병직발(發) 투기붐’은 내가 살던 시흥까지 바람이 몰아쳐 구미 내려올 때 전세 놓고 왔던 집이 엄청나게 올라버렸다.
그렇게 안팔리던 집이 부동산 가게에 내어놓자마자 1억 이상의 시세차액을 남기고 팔 수 있었는데 순전히 추 장관 덕이었다. 추 장관이 참 따뜻하고 다정스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순간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내 곁으로 재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였다. 손만 살짝 뻗어도 붙들 수 있는 지근거리였는데 추병직 장관한테 한 눈 팔다 그만 놓쳐버렸다.
지금껏 이야기한 내용만 봐도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청와대 의전과 노무현 대통령 경호가 다른 대통령에 비해 얼마나 느슨했었는지 쉽게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국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누구라도 격의 없이 대면하려고 노력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소탈한 성격과 그의 정치철학이 반영되어 나타난 분위기가 아닌가 여겨진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쉬운 마음이 들어 집사람에게 노무현 대통령 뒷모습만 본 이야기를 했더니 집사람 왈 “저번에도 무슨 대통령 마케팅 한다며 영화를 도로 망쳐놓더니 노무현 대통령 말년에 여론도 안 좋은데 당신 시집 전해드렸으면 더 망칠 뻔 했다”면서 “시집 전달 못한 것이 천만다행이다”고 했다.
배창호 감독 독립영화《길》의 스틸컷
사랑가
박상봉
오랜 세월 기다려온 여자를 만났건만
사랑한다는 말 가슴 속에 묻어 둔 채
정처 없이 길 떠나야겠네
소낙비 쏟아지는 깊은 밤 갈대 숲
바람소리 물소리 귓전을 때리는데
가야할 길도 없이 서둘러 가는 걸음
아픈 마음일랑 은달개비꽃술에나 걸어두고
쉴 곳을 찾아가는 조각달 따라
새벽이 오기 전 강을 건너야겠네
불꽃같이 타오르던 사랑도
식어 재가 되는 그런 사랑 원하지 않아
기약없는 약속은 남기지 않겠네
ㅡ박상봉 첫 시집 『카페 물땡땡』
사랑을 이루기보다 사랑을 품은 채 떠나는 마음을 노래한 시다. 화자는 기다려온 여자를 만났지만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길을 떠난다. 갈대숲의 바람과 물소리, 은달개비꽃과 조각달 같은 이미지들은 말하지 못한 사랑의 쓸쓸함을 더 깊게 만든다.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식어버릴 사랑 대신, 화자는 차라리 기약 없는 약속을 남기지 않는 길을 택한다. 결국 사랑은 완성이 아니라 가슴에 품고 떠나는 고독의 미학이 아닌가 싶다.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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