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손등에 꽃을 심고 날마다 찐빵을 먹고 흙집을 지었지
밭을 갈면서 땅에 뿌리 박고 살고 싶었지
땅속으로 발이 자라면 가고 싶은 곳에 못가잖아요
奧地日記(오지일기)
신경림
거리에는 아직 가을볕이 따가웠다
수수밭에 바람이 일고
미류나무가 누렇게 퇴색해도
활석광산으로 가는 트럭이 온 읍내를
먼지로 뒤덮는 추분.
그 탁한 먼지 속에서 나는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되었나보다
지치고 맥빠진 그 따분한 사랑을.
사과가 익는 과수원을 돌아
거기 연못을 찾아가면 여자는 이내
말을 잃고 나는 그 곁에서
쓴 막 소주를 마셨다.
어디에도 내 친구들은 없었다
연못 위에는 낮달이 떴으나
떠도는 것은 숱한 원귀들 뿐이었다
여자는 더욱 말을 잃었지만
삶은 갈수록 답답하고 가을이 와도
읍내는 온통 먼지로 뒤덮였다
물가 술집 마루에 와 앉으면
참빗장수들 구성진 노랫가락
물바람 타고 오고
바라보면 멀리 뻗친 고갯길
타박대는 외지 장꾼들, 또 일소들.
여자의 치마에 개흙이 묻어 돌아오는
미류나무가 누렇게 퇴색한 언덕길에서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되었나보다
지치고 맥빠진 그 따분한 사랑을.
수수밭에 바람 일고 추분이 와도
거리에도 죽음에도 간판에도 가슴에도
온통 뿌옇게 먼지만 쌓였다.
영화 ‘먼지로 돌아가다’ 한 장면
먼지로 뒤덮인 환경 속에서 사랑과 삶의 답답함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신경림의 「奧地日記(오지일기)」는 그의 시집 『새재』에 수록된 시로, ‘나루터 일기’ 등과 함께 신경림의 대표시로 손꼽힌다.
민중의 삶에 뿌리박은 빼어난 서정성과 친숙한 가락으로 진정한 리얼리즘을 구현했다고 평가받는 신경림의 시세계는 『농무』 이래 몇단계의 변모를 거쳐왔으나, 언어의 경제에 충실하면서 시와 삶의 본령을 추구해온 발걸음만은 변함없이 이어왔다.
살아생전 신경림 시인은 1970,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선 문단의 자유실천운동 · 민주화운동에 부단히 참여하여 여러 단체의 주요한 역할을 다하는 가운데서도 구호화된 시에는 경사되지 않았고, 90년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의 총공세가 펼쳐지는 세태 속에서도 불의와 비인간을 용납지 않는 올곧음이 한결같은 민중시인이었다.
신경림의 시를 다시 읽으면서 리뤼준 감독 및 각본의 2022년작 중국 영화 《인루천옌(隐入尘烟·Return to Dust; 먼지로 돌아가다)》가 떠올랐다.
제72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공식 초청작으로, 중국 농촌의 빈곤과 재개발 등의 사회문제를 다룬 중국 서북부의 작은 농촌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다.
영화 ‘먼지로 돌아가다’ 포스터
주인공 마유톄는 재산이라고는 당나귀 한 마리와 누군가가 버리고 간 빈집 하나뿐인 가난한 농부다.
중국의 계획생육정책과 극심한 남녀 성비 불균형으로 인해 농촌엔 여자가 매우 귀했다. 그로 인해 마유톄 또한 결혼하지 못한 채 노총각으로 늙어가고 있다.
어느날 유톄는 결혼시장에서 생식기에 장애가 있어 출산도 불가능하고, 남의 도움 없이는 대소변도 가릴 수가 없어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 여성 구이잉을 200위안의 차이리(지참금)를 주고 사오게 된다.
헐값에 팔려온 결혼생활이었기에 구이잉은 좀처럼 유톄에게 마음을 열지 않지만, 점차 남편 유톄가 극진하게 자신을 보살펴주며 다정함을 보여주자 마음을 열게 된다. 가난하고 힘든 생활 속에서 둘은 흙집을 짓고 서로를 의지하며 소박하게 살아간다.
영화 ‘먼지로 돌아가다’ 한 장면
그러던 어느날 구이잉은 밭일을 하던 유톄를 찾아가던 중, 실수로 물에 빠져 익사하고 만다.
유톄의 형은 흙집을 허는 대신 재개발 아파트를 살 수 있게 남동생에게 명의를 빌려달라고 한다. 유톄가 자살했음을 암시하는 농약병 위로 “2011년 겨울, 남주인공은 정부와 열성적인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여 새로운 삶을 살았다”는 자막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끝만 보면 새로운 집에 이사하여 새로운 삶을 살았다는 해피엔딩 자막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인공인 유톄가 장가도 못가고 재산도 모으지 못하다가 어렵사리 결혼했으나 아내가 사고로 죽고 남편도 자살해서 매장된 새로운 집이기에 실상은 정부와 사람들의 외면 속에 유톄와 같은 농촌 남자들의 비참한 삶을 역설적으로 풍자한 자막이다.
새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도 죽은 뒤의 삶이기에 중국 정부와 국민들의 외면 속에 농촌에서 가난하고 병든 남녀들이 제대로 결혼도 하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고발한 것이다.
흙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이자 생존을 찾아 떠나는 인간을 정착 시키는 토양으로 충분했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처럼 모든 생명의 시작과 끝은 흙으로부터 비롯됐다.
영화의 제목을 ‘먼지로 돌아가다’로 번역했는데 내용으로 볼 때는 ‘흙으로 돌아가다’가 옳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들은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이 한 문장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중국의 오행 사상에서 핵심은 ‘土’, 곧 세상의 중심이 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의 용포가 황토색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중국의 황허와 양자강이 뱉어낸 황토가 중국 전체를 덮고 있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도 봄이 되면 황사를 뒤집어쓰게 된다.
영화 ‘먼지로 돌아가다’ 한 장면
그런데 실은 흙에서 나온 것들로 몸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이 모두 흙이다. 아침에 먹은 배추와 무, 감자와 옥수수, 밀이 우리 몸이다. 그래서 죽을 때는 몸을 흙으로 돌려줘야 하고,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무가 흙이다.
흙은 생명을 길러낸다.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이 생명현상의 기본이 죽음이다. 죽어야 생명이 탄생한다. 밀 씨앗이 죽어야 수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농부는 그런 생명 사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마 유티에는 농부인데 그는 흙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는 흙에서 밀, 옥수수, 감자를 길러내고 흙으로 집을 짓고 흙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실은 우리 생애도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꽃을 피운다는 것. 꽃이 피어야 열매를 맺듯이 우리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인 ‘사랑’이 있어서 우리 삶도 의미를 갖는다.
이 영화는 사랑의 모습을 장애를 가진 아내에 바치는 주인공의 태도에서 보여준다. 그것의 상징이 서로의 손목에 씨앗으로 꽃무늬를 찍어주는 행위, 사랑=꽃의 공식이다. 이 사랑에는 세속적인 가치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먼지로 돌아가다’ 영화 한 장면 손등에 꽃을 심고 날마다 찐빵을 먹고 흙집을 지었지
한편 이 영화의 메시지는 흙과 자본주의의 대립에도 초점이 맞춰져 있다. 흙의 생명 사업에 대비되는 자본의 비생명 현상이다. 달걀을 얻어서 닭은 키우고 달걀을 얻는 일도 흙의 사업 일환이다. 달걀이 하나의 중요한 모티프다. 병든 아내에게 처음 얻은 달걀로 만든 수란을 먹이는 일이나 주인공이 죽기 전에 먹는 달걀 한 알이 그것이다.
삶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지 감독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주인공은 죽기 전에 당나귀를 놓아준다. 가축이라는 게 얼마나 끔찍한 운명인가. 대대손손 착취당할 수밖에 없는 가축의 운명. 주인공은 그 족쇄를 풀어주고 흙으로 된 산을 넘어간다.
흙에 발자국을 묻는 일의 메시지. 흙에 붙박혀 태어나서 열매를 다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하는 식물들.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영화였다. 미처 챙기지 못한 문학적 대사가 많이 나온다.
영화 ‘먼지로 돌아가다’ 한 장면
밭에 씨앗을 뿌리다가 남자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땅에 씨앗이 아니라 당신의 발자국을 심는 것 같아. 발자국이 자라면 어떡하지?
-발은 땅에 단단히 묶여 있어서 우리는 땅을 벗어날 수 없어
-발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까?
개봉 초에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해 흥행에 실패한 듯 보였으나, SNS에서의 호평과 관람객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개봉 2개월이 지난 뒤 제작비가 200만 위안(약 3억9716만 원)에 불과한 영화가 1억 위안(약 198억5800만 원)의 흥행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
따라서 장기 상영을 통해 더 흥행 수입을 노려볼 수도 있었으나, 갑자기 검열 사건으로 인해 상영이 종료되고 말았다.
국내에서도 본래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초청해 상영하려 했으나, 검열 사건 영향으로 상영이 취소되고 말았다.
해당 영화에서 중국 서북부 농촌의 빈곤한 모습과 농촌 남성들이 장가 가기 어렵거나 식량 부족 등 현실 상황을 실감나게 그려냈고, 중국 빈곤 지역 농민들의 실생활을 반영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시청자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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